이치고다씨 이야기 4
오자와 마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곁에 있는 예쁜 사람과 어깨동무
 [만화책 즐겨읽기 47] 오자와 마리, 《이치고다 씨 이야기 (4)》



 둘째 아이는 어느덧 백날이 지났습니다. 둘째 아이가 우리한테 온 지 한 달 즈음이던 무렵, 새벽나절 이야기를 퍽 고달피 끄적이곤 했습니다. 그무렵 공책에 끄적인 고달픈 이야기를 옮겨적어 봅니다.

 ‘오늘도 새벽 두 시 이십오 분에 번쩍 눈을 떠서 첫째 밤오줌을 누입니다. 이레째 이어지는 장마이기에 방에 불을 넣고는, 지난밤 빨아서 넌 기저귀를 방바닥에 곱게 펼칩니다. 빨래를 새로 더 할까 생각하다가, 아직 방바닥이며 빨랫대이며 다 마르지 않았는데 더 하자면 말리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고 셈틀을 켜며 글조각을 붙잡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옆지기는 젖이 불어 짠다며 일어나고, 아이는 어머니 일어나서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깹니다. 새벽 세 시 삼십 분에 잠에서 깬 아이는 다시 눈을 붙일 줄 모릅니다. 잠자리에 드러누워 눈이 말똥말똥해서는 노래를 부르다가 어머니한테서 꾸지람을 듣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호젓하게 글조각을 붙잡는 두어 시간이지만, 오늘은 이 두어 시간을 즐길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둘째는 속이 꾸물꾸물한지 방귀를 북북 뀝니다. 똥을 한 바가지 쏟고서야 잠들는지 모릅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니 첫째는 이 소리 때문에라도 다시 잠들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끄적인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머나먼 옛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고작 두 달쯤 앞서 일이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안 떠오르는가 싶기도 하지만, 애써 떠올릴 만하지 않으니 안 떠오르는가 싶기도 합니다.

 한편, 아이들이 잠투정을 좀 한다고 아버지 된 사람이 이렇게 꽁꽁거리는 모습이 딱합니다. 잠투정을 하니까 더 달래고,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깨어 노래를 부르면 보드라이 달래서 다시 재우면 될 텐데요.

 가만히 돌이키면, 하루하루 살아낸 어제나 그제 모습은 참 부끄럽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을 더 알뜰히 일구는지는 잘 모릅니다. 부끄럽던 모습이라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달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에 더 마음을 기울이느라, 아니 오늘 하루도 다시금 지치거나 고단하다고 여기며 꽁꽁거리느라, 언제나 새로운 날을 언제나 고맙게 맞아들이지만, 정작 사랑스레 되새길 만큼 내 마음밭에 아로새기지 못한달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오늘 일을 나중에 얼마나 떠올릴까요. 아이들은 저희 어린 나날 어떠한 모습으로 지냈는가를 어느 만큼 또렷하게 되새길까요. 오늘 하루 보내는 삶이란 나중에 어느 만큼 되짚을 만한 값이나 뜻이나 빛이 있을까요.

 
- “하지만 이온에겐 하나뿐인 소중한 거니까요.” (42쪽)
-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응.” “왜?” “왜냐니? 그야 친구의 일이니까.” (47쪽)
- ‘예를 들어 할아버지에게 유미가 얼마나 예쁘고 소중한 손녀인가 하는 것도 말이야.’ (100쪽)



 졸리면서 낮잠을 안 자려고 버티는 첫째 아이를 뒤로 한 채 먼저 자리에 눕습니다. 아버지는 으레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고 첫째는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납니다. 둘째는 새벽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사이에 깹니다. 어린 아이들이 참 일찍 깨는구나 싶지만, 이 아이들은 자연이 부르는 소리를 맞아들이기에 일찌감치 잠에서 깨어 놀고 싶을 수 있습니다. 자연을 이루는 풀이든 나무이든 풀벌레이든 멧새이든 멧짐승이든 무엇이든 천천히 알맞게 따스해지는 기운을 받으면서 기지개를 켭니다. 기지개를 켠 자연스러운 목숨은 한결같이 새로운 목숨을 빛내면서 새날을 즐거이 살아갑니다. 우리 아이들 또한 새 하루를 새로운 기쁨으로 맞아들이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길을 걷겠지요.

 갓난쟁이는 틈틈이 잠을 잡니다. 어머니 젖을 물고 조금 놀다가는 이내 새근새근 잡니다. 첫째 또한 틈틈이 잠을 잘 만합니다. 신나게 놀고 맛나게 먹다가는 달게 잠들 만합니다. 먹고 놀며 잠들어야 튼튼하게 자라요. 다시 먹고 놀며 잠들어야 아름다이 커요. 거듭 먹고 놀며 잠드는 동안 시나브로 우뚝 섭니다.

 오늘은 첫째 아이가 모처럼 두 시 조금 넘어서 곯아떨어집니다. 첫째 아이가 곯아떨어지고 둘째도 어머니 품에서 고요히 잡니다. 이 틈에 부시시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나서 미룬 기저귀 빨래를 합니다. 똥기저귀 한 장에 오줌기저귀 여덟 장. 이동안 이렇게 많이 나왔다 싶어 놀라지만, 한 시간에 두 장쯤 가볍게 나오니까 세 시간에 아홉 장쯤 나올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슥슥 비누를 문지르고 북북 거품을 냅니다. 똥 기운과 오줌 기운이 깨끗이 빠져나가 다오 하고 빌면서 기저귀를 빱니다. 마지막 기저귀를 헹구고 턴 다음 통에 담으며 ‘다 끝났구나!’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제 마당으로 나가 하나씩 넙니다. 밝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잘 마른 빨래를 걷습니다. 날마다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하면서 이 고운 햇살을 아이들 옷가지마다 받아들일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빨래를 널고 걷으면서 이 예쁜 햇살을 내 몸뚱이에 맞아들일 수 있으니 좋습니다.

 손으로 기저귀를 빨면서 갓난쟁이가 눈 오줌 기운을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톱으로 느낍니다. 아이가 눈 똥 또한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톱으로 헤아립니다. 코로는 냄새를 맡고 살갗으로는 똥물과 오줌물과 비눗물과 헹굼물을 느낍니다.


- “넌 진짜 착하구나.” “어? 뭐가?” “그 애한테 옷 만들어 줬잖아.” “그야 옷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내가 보기엔 오히려 요스케가 착한 거 같은데.” “어떤 점이?” “방금도 상관없는 일인데 같이 와 줬잖아.” (60쪽)
- “저 아저씨는 나가노라면서?” “미안, 농담이야. 적당히 말해 본 거였어.” “뭐?” “믿는지 어쩐지 확인해 본 거야.” “당연히 믿지. 넌 거짓말 안 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짓 좀 하지 마. 실례야.” (64쪽)


 만화책 《이치고다 씨 이야기》(학산문화사,2011) 4권을 생각합니다. 딸기밭 아가씨는 ‘죽음을 앞두고 넋이 빠져나가는 몸뚱이’에 깃들며 제 목숨을 잇습니다. 굳이 몸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이 없어도 되는 외계별 사람 ‘이치고다(딸기밭)’ 아가씨이지만, 아니 아가씨인지 아저씨인지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이치고다 씨는 작은 인형 몸에 깃들면서 입이 아닌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람들 이야기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습니다. 이치고다 씨가 품은 뜻을 마음이라는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착한 사람일 때에만 이 목소리를 착하게 받아들이고, 착한 사람일 때에만 이치고다 씨한테 착한 삶을 들려주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착하지 않은 사람하고는 왜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데?’ 하고 궁금해 할 테지만, 착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굳이 궁금해 하지 않을 뿐더러, 이치고다 씨처럼 자연스러운 목숨붙이하고는 이야기꽃을 피우려 하지 않겠지요. 곧, 착하지 않은 사람은 살구나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도라지꽃하고 이야기를 섞을 수 없습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깃든 눈물과 웃음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 “인간 안에 들어가는 게 오래 사는 길이라면, 내 안에 들어와도 돼. 내 몸을 줄게. 난 이제 필요없는 애니까.” “안 돼! 나 그런 말 하나도 안 기뻐. 절대 안 돼! 유미는 계속 유미로 있어야 돼. 안 그러면 내 단 하나뿐인 여자 친구가 없어지잖아!” (전철 안은 놀다 지친 사람들로 가득해서 우리에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우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 전철 안에서도 우리들은 정말 보잘것없는 너무나 작고 가벼운 존재였다.) (92∼95쪽)
- “아, 그렇구나.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뭐 받았어?” “우리 아파트에는 산타 안 와. 굴뚝도 없고. 그리고 난 그런 거 안 믿어.” “어? 왜. 왜?” “나도 이제 곧 5학년인데, 얀이야말로 외계인이 그런 걸 믿어?” “어? 아니, 그냥. 재미있어 보이니까 동참해 볼까 뭐 그런 거지.” (140쪽)



 곁에 있는 예쁜 사람과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란 어려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돈벌이보다 착한 꿈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는 예쁜 사람하고 어깨동무를 하자면 내 이름값을 높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높일 까닭이 없으나 나를 낮출 까닭이 없습니다. 나를 자랑할 까닭이 없으면서 나를 깎아내리거나 숨길 까닭이 없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며 맑게 꿈을 꾸면 됩니다. 착하게 생각하면서 맑게 땀을 흘리면 됩니다. 돈버는 일자리에서도 얼마든지 착하게 손길을 내밀면서 맑게 구슬땀을 흘릴 수 있습니다. 큰 회사라든지 공공기관이라든지 저잣거리 한켠 좌판이라든지, 어디에서건 우리들은 착하게 웃으며 맑게 일할 수 있어요.


- “아카리라면 유미가 뭘 갖고 싶어 하는지 알까 싶어서 전화했어.” “왜 그렇게까지 유미를.” “아마 나도 유미처럼 외로운 아이였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149쪽)
-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설령 지금 엄마나 아빠가 옆에 없다 해도, 유미가 앞으로 어른이 되어서 누군가와 만나 결혼하면, 그때, 아이를 많이 낳아 대가족을 만들렴. 할아버지는 그때까지 유미 옆에 있을 테니까. 안심하고 어른이 되려무나.’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과 만나 결혼이라니. 그런 먼 미래의 일보다 난 지금, 엄마와 아빠가 그리워.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할아버지를 사랑하는데.



 곁에 있는 예쁜 사람한테 사랑씨를 내밉니다. 곁에 있는 예쁜 사람한테서 사랑씨를 받습니다. 나는 내 사랑씨를 건네고, 짝꿍은 짝꿍 사랑씨를 줍니다. 나한테 깃든 사랑씨는 내 마음밭에 있을 때에도 뿌리를 내려 무럭무럭 자랄 수 있으나, 내 마음밭에서 살살 날아서 내 짝꿍과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마음밭에 살포시 내려앉아 퍼질 수 있습니다.

 내 사랑씨만으로는 내 마음밭에는 한 가지 풀만 자랍니다. 내 짝꿍 사랑씨를 받아들이면서 내 마음밭에 두 가지 풀이 자랍니다. 내 사랑씨를 나누면서 내 짝꿍 마음밭에 두 가지 풀이 자라도록 돕습니다. 차근차근 사랑씨를 널리 퍼뜨리고, 나 또한 내 마음밭을 착한 넋이 감도는 수많은 사랑씨로 알뜰히 일굽니다. (4344.9.5.달.ㅎㄲㅅㄱ)


― 이치고다 씨 이야기 5 (오자와 마리 글·그림,황경태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3.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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