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프로젝트 -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
오영진 지음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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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녘이나 북녘이나 서로 머나먼 평화
 [만화책 즐겨읽기 53] 오영진, 《평양 프로젝트》



 두릅나무에 꽃이 피었습니다. 팔월 한복판에 이르러 두릅나무 꽃을 구경합니다. 두릅나무는 한겨울에 아주 앙상한 모습으로 조용히 섭니다. 마치 막대기를 얼기설기 박은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멋모르는 사람은 참말 웬 막대기를 세웠나 하고 고개를 갸웃할 만하지만, 멋모르는 여느 사람은 자가용을 타고 싱싱 내달리며 지나칠 테니, 길가나 숲에 막대기가 서건 말건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아니 눈부신 광고판이 아니라면 애써 쳐다볼 까닭이 없습니다.

 사월에 새잎을 따서 먹는 두릅나무는 새잎을 빼앗기면서 더욱 가녀린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더는 새잎을 따먹지 못할 때부터 아주 힘차게 잎을 내고 가지를 뻗습니다. 두릅나무는 싱그러운 목숨을 마음껏 뽐내면서 하늘바라기를 합니다. 금세 잎이 우거지고 키가 훌쩍 자랍니다. 사람들이 더는 새잎을 따먹지 않기를 바라듯 키를 높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또는 봄을 앞두고, 사람들은 두릅나무를 뎅겅뎅겅 자릅니다. 애써 가지를 뻗고 줄기를 굵혔지만, 두릅나무는 제 몸뚱이를 건사할 수 없습니다. 사월에 맛볼 싱그러운 두릅싹을 따먹으려는 사람들은 두릅나무가 스스로 키를 키우는 일을 반기지 않습니다. 언제나 가로막습니다. 늘 몸뚱이를 자릅니다.

 꽃을 피우는 두릅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두릅꽃을 예뻐 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팔월 한여름에 두릅꽃 하이얗게 노란 꽃망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애틋해 할 시쟁이가 있을까요. 우거진 잎사귀에 가려진 조그마한 꽃망울을 목이 꺾어져라 올려다볼 소설쟁이가 있을까요.


- “배 선생! 우리 편하게 갑시다.” (15쪽)


 오영진 님이 빚은 만화책 《평양 프로젝트》(창비,2006)를 읽습니다. 《남쪽 손님》(길찾기,2004)과 《빗장 열기》(길찾기,2004)라는 만화책 두 권으로 북녘사람 삶을 살포시 들여다본 이야기를 들려준 오영진 님이 새롭게 선보이는 《평양 프로젝트》를 읽습니다.

 오영진 님 만화책을 읽으면서 지난 1993년에 황석영 님이 내놓은 산문책 《사람이 살고 있었네》(시와사회)를 떠올립니다. 황석영 님은 책이름 그대로 당신이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남녘사람 누구라도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혔던 ‘사람이 살아가던 북녘’을 몸으로 깨닫고 나서 ‘글을 쓰는 황석영’ 님인 만큼 글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북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지 않을’ 수 없기에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오영진 님은 만화쟁이로서 ‘사람이 살아가는 북녘 이야기를 만화로 빚어서 풀어냅’니다. 머리에 뿔이 달린 도깨비가 아닌, 독재자 한 사람한테 넋이 나간 바보가 아닌,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갛게 물든 머저리가 아닌, 날마다 밥을 먹고 빨래를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을 마주한 이야기를 만화로 들려줍니다.


- “북측에서도 영어 교육을 강화한다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영어를 배우는 것은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입네다. 또한 시대적인 요구이기도 하지요. 기래서 우리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근데 이쪽 동네는 미제를 싫어하잖아요? 그런데도 영어 교육에 힘쓴다는 것이 좀 거시기하네요.” “하하! 선생께서 고저 모르셨구만기래요, 하하하!! 우리 공화국에서는 영어를 미제 식이 아닌 영국 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네다.” “그러니까, 여긴 원조로 가르친단 말이죠, 하하!” “고저 아새끼, 뭬가 웃을 일이라구서리…….” (39∼40쪽)


 북녘이 남녘보다 잘날 까닭이 없습니다. 남녘이 북녘보다 잘날 까닭이 없습니다. 북녘이 남녘보다 못날 까닭이 없습니다. 남녘이 북녘보다 못날 까닭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은 북녘에도 있고 남녘에도 있습니다. 못난 사람은 북녘에도 있으며 남녘에도 있습니다. 사랑꽃을 피우는 사람은 북녘과 남녘에 골고루 있습니다. 돈에 눈을 밝히면서 홀로 배부르려는 사람은 북녘이든 남녘이든 어김없이 있습니다.

 북녘에도 남녘에도 군대가 있습니다. 북녘이든 남녘이든 군대는 권력을 누립니다. 북녘이나 남녘이나 군대를 이끄는 이는 몇몇 권력자입니다. 북녘과 남녘 모두 군대에서 휘둘리는 이는 수많은 서민·백성·민중·인민, 그러니까 여느 사람들입니다. 북녘은 군대 때문에 사람들이 굶주리고, 남녘은 군대 때문에 사람들이 다툽니다. 군대를 꾸려 군대로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 모두를 억누르는 북녘입니다. 군대를 꾸리느라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 모두 억눌릴밖에 없는 남녘입니다.

 전투기 한 대를 줄이면 북녘에서는 수만 사람이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전투기 한 대를 줄이면 남녘에서는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시락 걱정을 안 해도 됩니다. 군함 한 대를 줄이면 북녘에서는 수십만 사람이 한결 넉넉하게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일굴 수 있습니다. 군함 한 대를 줄이면 남녘에서는 수십만 사람이 한껏 즐거이 아이를 보살피며 살림을 가꿀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전쟁무기부터 없애야 합니다. 전쟁무기를 호미와 낫과 쟁기로 바꾸어야 합니다. 전쟁무기 다스리던 군인한테 흙을 일구는 살림살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전쟁무기 만들던 과학자와 기업한테 손으로 빨래하고 손수 밥상을 차리는 집일을 일깨워야 합니다.


- “이건 정말 고급 정보인데, 그때 가면 낡은 아파트가 최고급 아파트로 둔갑하게 되거든요.” “오 선생이 뭘 모르시는구만기래요. 값비싼 아파트란 고저 항시 전기가 끊이지 않고 시원스레 공급되는 아빠트가 최곱네다. 중구나 평천 구역이 기렇지요.” “아이고, 참내, 전기는 나중에 다 들어오게 된다니까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무조건 제 말 듣고 낡은 아파트에 올인하세요!!” “이거 같이 말 못 하갔구만! 오데 상식이 통해야디!!” (145쪽)


 만화책 《평양 프로젝트》는 딱히 ‘다른 길(대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만화책 《평양 프로젝트》는 책이름 그대로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고, 그저 ‘프로젝트’로나마 이루어지는 만남을 가까스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만화책에는 북녘땅 평양마을 여느 사람들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프로젝트’에 따라 꾸린 모임에서 일하는 몇몇 사람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느 살림집을 취재할 수 없고, 여느 살림집 여느 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평양과 가까운 해주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평양 언저리 시골마을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평양하고 멀찍이 떨어진 멧골자락이든 바닷가이든 찾아갈 수 없습니다. 탄광이든 소금밭이든 찾아갈 수 있을까요.

 거꾸로 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북녘에서 남녘으로 찾아온 사람은 “서울 프로젝트”를 하겠지요. 그러면, 북녘에서 남녘으로 찾아온 사람한테 ‘남녘 정부 공무원’은 ‘북녘 취재진한테 무엇을 보여주고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떤 사람을 만나도록’ 하려나요. 북녘에서 남녘으로 찾아온 취재진은 남녘에서 여느 살림집 여느 사람들을 스스럼없고 거리낌없이 마주하면서 깊디깊은 속내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북녘에서 남녘으로 찾아온 취재진이 서울땅에서 용산 철거민을 만나도록 자리를 마련할는지요. 김진숙 님이나 지율 스님을 만나도록 ‘남녘 정부 공무원’이 다리를 놓을는지요.


- “동무 울지 마!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196쪽)


 더 보여줄 수 없지만, 덜 보여줄 수도 없는 만화책 《평양 프로젝트》를 덮습니다. 이 만화책 이야기는 참말 ‘프로젝트’로 끝날는지, 첫머리나 첫걸음이 될는지 아직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 만화책 이야기가, 또 북녘과 남녘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가,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예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이 모든 이야기가 꿈이 아닌 빛나는 삶으로 꽃피우자면, 이 땅 사람들부터 하나하나 바꾸어야 합니다. 착한 삶길이 되도록 내 삶길을 바꾸어야 합니다. 돈벌이 아닌 사랑을 찾도록 내 눈길을 고쳐야 합니다. 겉모습이나 물질문명이 아닌 푸나무와 새소리를 아끼도록 내 손길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4344.8.15.달.ㅎㄲㅅㄱ)


― 평양 프로젝트 (오영진 글·그림,창비 펴냄,2006.12.13./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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