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옮기는 일본 만화책


 일본사람은 한국사람보다 영어를 즐겨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일본사람은 웬만한 낱말을 으레 영어로 적어 버릇한다고까지 합니다. 일본말을 배우는 이는 따로 ‘일본 외래어 사전’을 곁에 두지 않으면 일본말을 익히지 못한다고 합니다.

 집에서 네 살 아이하고 일본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노라면, 어린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끌고 다니면서 거두어 도시로 가져가는 것은 ‘우유’ 아닌 ‘미루크(milk)’라고 이야기합니다.

 일본사람이 그린 만화책을 읽을 때에도 엇비슷합니다. 일본 만화책을 한글로 옮긴 이들은 일본사람이 쓰는 영어를 고스란히 옮겨 적기 일쑤입니다. 《네가 없는 낙원》(학산문화사,2006) 11권 106쪽에 “내 휴대폰으로 메일 주세요.”라는 대목이 나오고, 107쪽에는 “머리 위에서는 지금 지상의 눈보라로 인한 3D 아트 전개 중. 타이틀은, 으음.”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손전화’까지 바라기는 힘들다지만, ‘휴대전화’라 적을 수 있었을 테고, ‘쪽지’나 ‘쪽글’까지 바라기 힘들더라도 ‘문자’라 적을 수 있어요. 그나저나 “3D 아트 전개 중”은 어떻게 살펴야 할까요. 어쩌면, 번역하는 분마저 이런 말은 도무지 어쩔 수 없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놀라운 예술이 펼쳐진다”라든지 “꿈 같은 예술이 펼쳐짐”이라든지, 차근차근 실마리를 풀면 좋겠습니다. 122쪽에는 “한 장밖에 티켓을 구하지 못했어.”라는 대목하고 “이 메모 순서대로 병원으로 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꽤 흔히 쓰는 낱말이라지만, ‘티켓(ticket)’은 우리 말이 아니에요. 영어예요. 들온말이니 아니니를 따질 수 없는 바깥말인 영어입니다. ‘메모(memo)’야 워낙 자주 많이 쓰니 바깥말이라 느끼는 사람이 적다 할 텐데, 한국말은 ‘쪽글’이나 ‘쪽지’입니다.

 《치무아 포트》(대원씨아이,2011)라는 만화책 69쪽에서는 “나라는 샘플을 원하고 있지.”라는 대목을 봅니다. 한자말 ‘견본’이나 한국말 ‘보기’를 쓰지 않습니다. 123쪽에서는 “서비스로 드리지요!”라는 대목을 봅니다. “덤으로 드리지요!”나 “더 드리지요!”나 “그냥 드리지요!”라 적지 않아요.

 《봄으로 가는 버스》(대원씨아이,2007) 4권에 나오는 “선생님! 나이스 슛이에요!”는 일본사람만 흔히 쓰는 영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도 이제는 이런 영어를 아무렇지 않게 아주 보드랍게 써요. 농구를 하건 축구를 하건 “나이스 슛”이라고만 해요. “멋진 슛”이나 “멋져”라 하지 않습니다.

 《조폭 선생님》(대원씨아이,2011) 완결편 185쪽에서 보는 “어쩌고 하는 작업멘트를 날리다 그만”에서는 ‘작업멘트’라는 대목이 돋보입니다. “어쩌고 하며 작업을 거는 말을 날리다 그만”처럼 적지 않을 뿐더러, “작업을 거는 말”을 ‘작업말’이라 이야기하는 일이 없어요. 으레 영어로 ‘멘트(ment)’라 해야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더 들여다보면 ‘作業’이라는 낱말부터 알맞지 않게 쓴 셈인데, ‘꼬드기다’나 ‘꾀다’라 적어야 하는데, 이렇게 엉뚱한 낱말을 쓰면서 영어 또한 얄궂게 들러붙는구나 싶어요. 180쪽에서 보는 “내 휴대폰 벨소리인데?”에서는 어느덧 한국말로 뿌리를 내렸다고 할 만한 ‘벨소리’가 보입니다. “휴대전화 소리”나 “손전화 울림소리”나 “손전화 노랫소리”처럼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1) 5권 114쪽에 나오는 “아니, 오버야.” 같은 말 또한 어느새 영어로 느끼지 않는 한국말처럼 받아들입니다. “아니, 지나쳤어.”나 “아니, 김치국 마시지 마.”나 “아니, 헛물 켜지 마.”처럼 주고받던 말씨는 이제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는 듯합니다.

 《아빠는 요리사》(학산문화사,2011) 112권 107쪽에는 “둘이서 크리스마스 & 해피 버스데이 파티를 여는 거 어때?”라는 대목이 보이고, 111쪽에는 “몽자들은 이웃의 홈파티에 간 모양이다.”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그나마 ‘생일파티’조차 아닌 ‘버스데이 파티’라 하고, 꾸밈말을 덧달아 “해피 버스데이 파티”라 말하는군요. 일본사람이 이렇게 영어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더라도, 한국 어린이와 푸름이와 어른이 보는 만화책에는 “둘이서 성탄맞이와 즐거운 생일잔치를 열면 어때?”처럼 적기란 어려웠을까 궁금합니다. ‘홈파티’라는 말도 그렇지요. 집에서 여는 잔치라면 ‘집잔치’일 텐데요.

 《신의 물방울》(학산문화사,2005) 1권 37쪽에는 “와인을 만들기에는 최고의 빈티지였어.”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만, ‘빈티지(vintage)’는 포도술을 가리킵니다. 어느 해 어느 곳에서 만든 좋은 포도술을 가리킨다고 하는 만큼 “와인을 만들기에는 최고의 빈티지였어”는 말이 될 수 없어요. “포도술을 빚기에는 가장 좋은 해였어.”처럼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그나저나, ‘빈티지’라는 영어를 ‘구제(舊製)’라는 한자말과 같은 뜻으로 쓰면서 “오래되면서 무언가 멋이 있는 옷이나 물건”이라 여기곤 하는데, 이렇게 쓰는 일은 알맞지 않아요. 빈티지이든 구제이든, 한국말로는 ‘헌옷’입니다. 낡은 옷이거나 오래된 옷이에요. 헐거나 낡거나 오래되었으나 빛이 난대서 달리 영어로 나타내려 하는지 모르나, ‘헌책’이든 ‘헌집’이든 값이나 뜻을 찾는 사람은 나 스스로입니다. 물건은 물건 그대로 꾸밈없이 가리키면서 내 마음을 따스히 돌보아야지 싶어요. 41쪽에는 “신의 솜씨 같은 그의 디켄팅이 쇠사슬에 묶여 있던 떨떠름한 리쉬부르를 해방시켜 줬고”라는 말마디를 봅니다. ‘디켄팅(Decanting)’이라고만 해야 전문 낱말인 듯 생각하기에 그대로 영어로만 적는구나 싶은데, 한국말 ‘옮겨따르기’나 ‘옮겨담기’로 적으면 됩니다. 번역하는 일이란 ‘옮기기’나 ‘옮겨적기’입니다. 옮기어 따르는 동안 찌꺼기를 거르는 만큼, 이렇게 ‘옮겨따르기’라고만 하면서 얼마든지 포도술 거르기를 보여줄 수 있어요.

 《미녀는 못 말려》(서울문화사,2004) 3권 85쪽에 “자아, 클린 스태프는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하는 말이 나옵니다. ‘클린 스태프’라 해서 무언가 했더니 ‘청소 일꾼’, 곧 ‘청소부’를 가리킵니다. 말놀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청소하는 분”이나 “청소를 맡는 분”으로도 옮길 수 있고, ‘맑음이’나 ‘깔끔이’처럼 새말을 지을 수 있어요. 그런데 8쪽을 보면, “집에서 얘랑 디너하기로 했거든.” 하고 나옵니다. ‘저녁’이나 ‘저녁잔치’처럼 쓰지 않아요. 영어로 겉멋이나 겉치레를 부리는 아이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111쪽에는 “빅뉴스야, 빅뉴스!” 하고 나옵니다. “대단한 소식이야!”나 “놀라운 이야기야!”처럼 이야기하지 않아요. ‘빅’이든 ‘뉴스’이든 가볍게 써요.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대원씨아이,2011) 2권 6쪽에서는 “하루카의 걸프렌드 사호구나!” 하는 글월을 봅니다. 여자인 친구이니 ‘여자친구’이지만, 이렇게 영어로 가리키는 일을 더없이 마땅하다는 듯 여깁니다. 143쪽에는 “모처럼 즐거운 피크닉에 와서” 같은 글월을 볼 수 있어요. “즐거운 나들이”나 “즐거운 들놀이”나 “즐거운 봄나들이”라 적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 제아무리 영어로 온갖 삶과 이야기를 나타낸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만화책은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즐기도록 해야 할 테지만, 한국말을 어떻게 가다듬으면서 알맞게 적바림해야 좋을까 하는 대목을 거의 돌아보지 못한다고 하겠어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이러하며 이듬날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리라 느낍니다. 사랑을 깊이 담아 주고받는 말이 되지 못합니다. 생각을 알뜰히 기울여 나누는 글이 되지 못합니다. 즐거이 놀이하듯이 어우러지는 이야기로 뻗지 못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여기에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즐겨 읽는 만화책에서도,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예쁘게 맞아들이면서 곱게 아로새기기란 너무 힘듭니다. (4344.6.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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