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는 어른
어른은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가 어른을 키울 수 없습니다. 때때로 아이가 어른을 깨우치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을 키우지 못합니다. 오직 어른이 아이를 키울 뿐입니다.
아이는 이것을 먹고 싶거나 저것을 갖고 싶다 말할는지 모릅니다. 아니, 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아이한테 아이가 먹고 싶다 해서 다 먹이지 않고, 아이가 갖고 싶다 하기에 다 장만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이가 먹어야 할 밥을 장만해서 먹이고, 오로지 아이가 갖추며 즐겨야 할 것을 장만해서 건넵니다.
아이가 어떤 책을 읽으려 할 때에는 어른이 먼저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어른이 먼저 읽지 않은 책을 아이한테 섣불리 쥐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어느 책을 읽기 앞서 다른 어른이 ‘아이가 읽을 책’을 만듭니다. 곧, 내가 되든 남이 되든 ‘어느 어른이든 먼저 책을 알아보고 읽어서 책 하나로 태어나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어른이 책을 써서 읽고 만들어야 비로소 아이가 책 하나 손에 쥡니다.
아이는 자가용이든 자전거이든 스스로 타지 못합니다. 어른이 장만한 자가용에 타는 아이요, 어른이 태우는 자전거에 타거나 어른이 마련한 자전거에 혼자서 타는 아이입니다. 어른이 자가용을 타면 아이도 자가용을 탑니다. 길들거나 익숙해집니다. 어른이 자전거를 타면 아이도 자전거를 타요. 어른이 두 다리로 걷기를 좋아하면 아이도 두 다리로 걷기를 좋아합니다. 어른이 숲을 좋아해서 시골에서 살아가면 아이도 숲을 좋아하면서 시골 아이로 자랍니다. 어른이 물질문명을 좋아해서 도시에서 살아가면 아이도 물질문명에 젖어들면서 도시 아이로 큽니다.
교사는 어른이 맡습니다. 교사를 어린이가 맡을 수 없습니다. 배우는 쪽은 어린이요, 가르치는 쪽은 어른입니다. 어른은 아이가 배워야 할 여러 가지를 스스로 먼저 헤아릴 뿐 아니라 몸소 살아내고 나서야 아이한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머리에 든 지식으로 아이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는 지식이 아닌 삶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살아내는 모습에 따라 교사가 가르치려는 이야기를 배웁니다. 교사가 살아내지 못하면서 지식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가 하나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잘못 받아들이고야 맙니다.
어른이 논밭을 일굴 때에 아이도 논밭을 일굽니다. 어른이 평화를 사랑할 때에 아이도 평화를 사랑합니다. 어른이 사랑을 나누려 할 때에 아이도 사랑을 나누려 합니다. 어른이 보리밥을 먹으면 아이도 보리밥을 먹습니다. 어른이 생활협동조합 회원이 되어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려 할 때에 아이도 삶과 사람과 자연을 아끼는 길을 걷습니다.
야구나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경기를 즐기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야구나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경기를 시나브로 즐기기 마련입니다. 땀흘려 일하기를 즐기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땀흘려 일하는 보람을 몸으로 깨우치며 받아들입니다. 돈으로 일을 하고 돈벌이에 더 매달리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는 돈을 더 살피거나 섬기며 돈으로 무엇이든 하려고 나서기 마련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키웁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살아가면서 배웁니다. 어른은 교과서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이는 교과서를 배우지 않습니다. 어른은 어른 삶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아이는 어른 삶을 바라보면서 저희 삶을 키웁니다. 어른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책 지식이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손재주가 뛰어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따사롭거나 넉넉하거나 아름다이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을 참답거나 착하거나 슬기로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4344.6.8.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