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낳기


 둘째가 태어나자면 두 달쯤 남았다. 두 달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달을 곰곰이 생각하며 집안을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갈무리해야 한다고 느끼지만, 하루하루 닥치는 일을 맞아들이는 데에도 넋이 나가고야 만다. 이래서는 안 될 텐데, 애 어머니가 더 힘들어 할 모습만 보여주니 나 스스로 몹시 부끄럽다.

 글쓰기로 살아가는 내 나날을 곱씹는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한다면, 난 무슨 글을 써야 할까. 내가 나 스스로하고 내 옆지기하고 내 아이 앞에서 떳떳하며 올바른 삶을 일구는 모습으로 함께 어깨동무를 하자면, 나는 어떤 글부터 써야 할까.

 여러 달 차근차근 생각한 끝에 지난주부터 조금씩 갈피를 잡는다. 나는 다른 어느 글보다 ‘아빠 육아일기’를 써야 한다고 느낀다. 앞으로 자라날 푸름이한테 들려줄 ‘아빠 육아일기’부터 쓰지 않고서야 내 글이 글다울 수 없겠다고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그닥 옳거나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만큼, 이러한 글을 제대로 쓸는지 못 쓸는지 아리송하다. 그렇지만, 이 글부터 쓰지 않고서야 다른 무슨 글을 쓴다고 깝죽댈 수 있겠는가.

 아직 옆지기한테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글을 옆지기가 읽는다면 알아챌 텐데, 내가 쓸 ‘아빠 육아일기’란 나 스스로 겪은 삶뿐 아니라 나 스스로 맞아들일 삶을 쓰는 글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나씩 다스리거나 다독이는 삶을 적는 글이어야 하는 셈이다. 둘째를 낳기까지 집안을 어떻게 갈무리하면서 어떤 매무새로 어떤 일을 살피는가부터, 둘째를 집에서 낳도록 어느 만큼 마음을 기울이고 몸을 움직이는가를 더 배우고 돌아보면서 쓸 글이어야 한다.

 잘 못하니까 다시 배우고 새로 배우면서 써야 한다. 제대로 못했으니까 거듭 배우고 꾸준히 돌아보면서 써야 한다. 나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게끔 삶을 고쳐야겠지. 나부터 이러한 이야기가 겉발린 말이 아닌 몸으로 움직여 내는 하루하루가 되도록 살아가면서 글을 써야겠지. 그러니까, 내 삶을 바꾸고자 내 글을 바꾸어야 한다. 내 글을 바꾸면서 내 삶을 바꾸고, 내 삶을 바꾸면서 내 글을 바꾸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첫째를 낳아 돌본 나날이란 내 삶을 고치는 나날이었으나, 영 뾰족하거나 시원하거나 아름답게 고치지 못한 나날이라고 느낀다. 그럭저럭 나아지기는 했다손 칠 수 있겠지. 그래, ‘했다손 칠’ 수 있다. ‘했다’고 여길 수 없다.

 둘째를 낳을 때까지도 나는 내 삶을 못 고치는가. 둘째를 낳는 자리에서마저 나는 내 삶을 고치려고 애쓰지 못하겠는가. 삶을 고쳐야 글을 고치고, 글을 고칠 때에 모든 일이 풀리기 마련이다.

 아침부터 저녁 아홉 시까지 집일만 하느라 글이건 책이건 손에 쥘 수 없었다. 그러나 집안일이란 이렇다. 게다가 이렇게 집일 하나만으로도 글이건 책이건 손에 쥘 수 없다 하더라도 살림을 옳게 했다고 여길 수 없다. 살림을 옳게 하자면 더 마음을 쏟아 훨씬 제대로 살아내야 한다.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한다고 살림이 아니다. 이는 그저 집일일 뿐이다. 집일을 했다고 살림을 했다 말하지 않는다. 날마다 맞아들이는 집일만큼, 날마다 여미거나 다스릴 살림이 있다. 나는 어느 무엇보다 이 살림 다스리기에 너무 젬병이었거나 무디었다. 이제 두 달이면 코앞이라 할 만한데, 짧다면 아주 짧은 나날이지만, 이 짧은 나날이 짧지만은 않도록 더 잘 살아가고 싶다. 더 사랑스레 살아가고 싶다. 온몸이 찌뿌둥하며 고단하지만, 난 오늘 이 말을 글 한 조각에 담고 싶어 졸립고 지치지만 두 시간째 셈틀 앞에 앉아서 글을 쏟아낸다. 글을 쏟아내는 까닭은 이렇게 다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허튼 말이나 겉발린 시늉으로 그치고 싶지 않으니까, 참말 잘 살고 싶으니까, 참으로 즐거이 살고 싶으니까, 이렇게 다짐을 하려고 두 눈을 부릅뜨면서 한 글자 두 글자 적는다. 팔꿈치가 대단히 시리다. (4344.3.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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