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아닌 삶으로 읽을 책과 말
― 정재도, 《국어의 갈 길》


- 책이름 : 국어의 갈 길
- 글 : 정재도
- 펴낸곳 : 문헌각 (1962.7.15.)


 오늘날 우리들 주고받는 말과 글은 퍽 엉터리라 할 만합니다. 저부터 아직 엉터리에서 오락가락하는 말을 한다고 느낍니다. 여태껏 꽤 많이 배우며 받아들였으나, 앞으로 새롭게 익히며 살필 대목이 몹시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쓰는 말과 글인데 이러한 말과 글을 옳고 바르게 보여주거나 이끌거나 가르치는 어른을 둘레에서 만나기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어른들이 ‘여보게 젊은이, 그런 말은 옳지 않아.’ 하면서 짚어 주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씀씀이나 말매무새를 짚는 어른을 만나지 못합니다. 아니, 어른들부터 옳고 바른 말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니까 서로서로 엉터리로 말하고 글을 읽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내 나이는 젊은이를 지나 늙은이하고 가깝다 할 만하기에 이제 나한테 내 말씀씀이나 말매무새를 짚어 줄 만한 어른이 없다 할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내가 젊은이나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옳고 바르게 가눌 말을 이야기해야 한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몇 가지 말마디를 짚어 주다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발끈해 하거나 못마땅해 합니다. 당신들이 옳게 못 쓰거나 바르게 못 쓰던 말투를 깨닫지 않아요. 받아들이거나 살피거나 알아채거나 하지 않아요. 그동안 얼마나 부끄러이 말하고 글썼는가를 돌이키지 않습니다.

 누군가한테 ‘당신이 바로 이 자리에서 쓴 이 말마디는 올바르지 않아요.’ 하고 말할 때에는 ‘넌 바보요. 넌 똥개야.’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말마디 하나를 옳게 아로새기면서 옳은 넋으로 일구어 옳은 삶으로 북돋우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가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는 오늘날 사람들 스스로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다이 살기를 안 바라니까, 말을 이렇게 잘못 쓰든 저렇게 엉터리로 망가뜨리든 아랑곳하지 않는달 수 있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쓰던 말투가 알맞지 않다 말해 주면 ‘당신은 이렇게 엉터리로 말을 하니까 입을 다물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은 적어도 이런 말투 하나라도 잘 새겨 주소서’ 하는 뜻인 줄을 헤아렸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헤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자말이든 고사성어이든 영어이든 번역투이든, 잘잘못을 낱낱이 짚어 밝히면 ‘마치 이 낱말이나 말투를 안 쓸 때에는 아무런 말을 못하기라도 할 듯’ 여기고 맙니다.


.. 같은 어학자 가운데서도 영어나 프랑스어나 도위치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보고 또 자기 자신들도 내로란 듯이 제법 뻐기는 태도를 가지는 대신, 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모두들 대수롭잖게 생각할 뿐더러 어느 의미에 있어서는 거의 업신여겨지다시피 하는 현상인 것을 본다 … 구미 각국의 외국어를 연구하는 이는 마치 외국의 진귀한 상품을 교역하는 무역상과도 같아서 화려할 수밖에 없는 대신, 국어를 연구하는 이는 저 시골에서 논 갈고 밭 갈고 하는 농부와도 같아서 아무래도 고즈넉할 수밖에 없다 ..  (추천글/이은상)


 책이란 삶이라,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읽습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읽는 동안 내 삶을 송두리째 아름답게 가다듬습니다.

 말이란 삶이라, 내 삶을 통째로 쏟으면서 주고받습니다. 내 삶을 통째로 쏟는 동안 내 넋이 거듭나고 내 얼이 다시 태어납니다.

 집에서 아이 기저귀를 빨든 집식구 옷가지를 빨든, 손빨래를 하는 동안 우리 살붙이 몸과 마음과 삶을 돌아봅니다. 찬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얼어붙고 따순물로 빨래를 하면 손이 틉니다. 고무장갑을 껴야 하는구나 생각하다가도 웬만해서는 고무장갑을 안 씁니다. 내 손부터 내 몸으로 오랜 나날 걸쳐 빨래하던 옛사람들 마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삼스레 다시 겪거나 부대끼면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잘하다 싶은 낱말이나 말투 하나를 더 알차고 알뜰히 추스를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해서 아주 조그마한 낱말 하나일지라도 사랑하며 보듬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거나 어슬프다고 잘못이 아닙니다. 생각이 없을 때에 잘못이요, 사랑하지 않을 때에 잘못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제 넋과 말을 골고루 사랑합니다.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제 얼과 글을 찬찬히 생각합니다.

 이제 이 나라 국어교사조차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식인은 더더욱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이든 정치꾼이든 공무원이든 대학생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하고 가장 동떨어졌다 싶은 ‘애 엄마’나 ‘밥하는 아줌마’들이 집에서 아이하고 복닥이면서 누구보다 말과 글을 가장 아끼거나 사랑하거나 생각한다고 느낍니다.


.. 우리 나라에는 ‘비니루 우산(비닐)’, ‘레루식 아궁이(레일)’, ‘비락 우유(빌락)’, ‘서울 빠다(버터)’, ‘피카디리 극장(피커딜리)’ 들이 익어 버린 것처럼 되어 아주 부끄러움도 없이 마구 쓰이고 있다. 모두 일본식 외래어 표기 방법에서 온 것이다 …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우리 나라의 멀쩡한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우리식 표기는 모르고, 일본식 표기만 좋아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일본의 압제를 받은 것이 뼈에 사무치게 고마와서 그러는 것일까? 그렇다면, 30여 년이나 일본의 법률에 익었으니까 우리 법률은 아랑곳없다고 할 것인가? … 그와 같은 것에 ‘코리아’가 있다. 영어로는 ‘코리어’, 불어로는 ‘코레’, 독어로는 ‘코레아’인데, 일본식이 ‘고리아’다. 아마 ‘코리아’가 이 일본식에서 나온 소린지 모른다. 그러나, 영어이니까 영어 발음대로 ‘코리어’로 할 것이지, 영어 발음 아닌 일본식으로 할 필요가 없다 ..  (126∼128쪽)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라는 데에 들어간 다음 헌책방에서 《국어의 갈 길》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랑 중학교랑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가 내 말과 글을 어떻게 사랑하거나 생각해야 하는가를 한 번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학교에서도 똑같았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구태여 비싼 등록금 바치며 학점과 졸업장을 따 보았자 내가 배울 알맹이는 없구나 싶어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인데, 어차피 고졸자로 내 가방끈을 맞춘달지라도 한동안 대학물 좀 먹은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답게 더 말을 살피고 더 글을 아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국어의 갈 길》을 낱낱이 새기며 읽었습니다.

 《국어의 갈 길》은 빈틈없이 알차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1994년 대학교 1학년이던 때에 돌아보더라도 서른두 해나 묵은 책이요, 둘째를 낳을 2011년에 헤아리자니 자그마치 마흔아홉 해나 묵은 책입니다. 좀 낡았다 싶거나 케케묵구나 싶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키니 낡거나 케케묵다 싶지, 지난날에는 이런 이야기 하나하나 꼼꼼히 다루며 나누고 싸우며 다독였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한껏 느긋하면서 즐거이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읽는 책이 아니라 삶을 읽는 책입니다. 지식을 뽐내는 말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말입니다. 지식으로만 읽으려 해도 대단히 도움이 될 만한 《국어의 갈 길》이었지만, 삶으로 맞아들이면 한결 따스하며 넉넉한 작은 책 하나입니다. (4344.2.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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