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너무 끔찍한 죽음터입니다
― 《민중교육론, 제3세계의 시각》


- 책이름 : 민중교육론, 제3세계의 시각
- 글 : 파울로 프레이리, 이반 일리치, 에브리트 라이머, 브리안 워렌
- 옮긴이 : 채광석, 양한수, 권태선, 김쾌상
- 펴낸곳 : 한길사 (1979.8.20.)


 나는 내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당신 삶에 걸맞게 아름다우면서 해맑은 삶을 깨달으면서 하루하루 즐겁고 신나는 나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꿉니다. 먼 뒷날일는지 곧 다가올 날일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이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지 말고, 바로 오늘 이곳에서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면, 아버지로서는 퍽 젊은(?) 나이에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기를 바랄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당신 또래 사람들 삶이 그러했으니까요. 일제강점기가 어떠한 삶자락인지 알 길이 없을지라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을 치르며 어린 나날을 보내고 나서 집안 사내 맏이로 살아내야 한 어른들이 걸을밖에 없는 길에서 흔들리거나 머뭇거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버지가 읽으셨는지 모르나, 아버지가 경기도 성남 쪽 초등학교 교장으로서 한창 힘과 이름을 날리실 때에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일본책(한글로 번역된 책)을 선물한 적 있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집 바깥에서 그토록 힘과 이름을 날리는 삶을 보내느라 애먼 나날을 흘리기보다, 밥하고 반찬하며 빨래하고 청소하는 ‘날마다 되풀이해도 끝나지 않고 그지없이 쌓이기만 하는’ 집살림을 돌아보면서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지낼 수 있기를 비손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장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선 분부터 ‘집에서 일하는 삶’을 몸으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당신이 교장으로서 꾸리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수많은 학원에 얽매이는 고리’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경기도 부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감 선생님으로 계실 때에, 그 학교조차 ‘다니는 학원이 10군데 넘는 아이가 10%가 넘는다’는 소리를 당신 입으로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학원을 그토록 많이 다니는 일이 어떠한 삶인지를 얼마나 살갗으로 받아들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에 붙들리며, 정작 집에서조차 느긋하게 드러누우며 쉬거나 놀 겨를이 없는 줄을 얼마나 헤아리며 걱정했는지 궁금합니다.


.. 많은 학생들 특히 빈곤한 집안의 학생들은 학교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가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학교는 과정과 실체를 혼돈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졸업증서와 사회적 능력·말의 유창함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과를 혼동하게 된다 … 학생의 상상력은 학교화되어서 가치 대신에 서비스를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의사의 진료행위는 곧 건강보호로 착각하고 사회활동은 시민생활의 개선이며 경찰보호는 안전이며 무력균형은 국가안보이며 맹목적으로 열심히 일만 하는 것이 생산적인 활동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 학습이나 정의는 학교에 의해서 증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육자들은 교육과정 이수와 자격획득을 결부시키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학교교육이 의무화되면서 학교교육은 학교교육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즉 의무교육이란 특권을 누리는 교사집단 속에 학생을 강제수용시키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집단을 더 많이 만들어 내게 된다 ..  (77, 88, 94쪽)


 학교가 학교로 되려면, 학교는 졸업장이 없어야 합니다.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학교는 상장이 없어야 합니다.

 저는 한때 ‘대안 상장’ 같은 상장이 있으면 좋겠거니 생각한 적이 있는데, 대안 상장도 똑같은 상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안학교라는 곳도 똑같이 학교입니다. 대안학교도 똑같이 학교이기 때문에, 이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나 이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어버이나 똑같은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면 안 되고, 아이들은 아이들을 사랑할 어버이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에서 자라야 합니다.

 아이는 자라야 하지, 아이는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커야 하지, 아이는 길들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는 책 줄거리를 외워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쓴 사람이나 책을 펴낸 곳 이름을 외워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가슴에 북받치는 아름다움이 꽃피어야 합니다.

 아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땀을 흘리며 즐겁고 기쁘며 보람찬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이란, 제가 우리 멧골집에서 아이한테 “벼리야, 이 접시 좀 밥상에 갖다 주렴.” 하고 시키는 일 따위입니다. 일이란, 제가 우리 시골집에서 아이보고 “벼리야, 아빠 빨래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겨울날 집에 물이 얼어붙어 웃마을로 가서 빨래를 하고 물을 걷습니다).” 하고 부르며 손을 잡고 멧길을 오르내리는 일 따위입니다.


.. 가난한 학생들이 학습이나 자기발전을 학교에만 의존하는 한 일반적으로 부유한 학생에게 뒤떨어지기 마련이다. 빈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학습을 가능케 하는 자금이지 그들에게 부족되고 있다고 인식되는 제도적 혜택을 증명받는 일은 아니다 … 의무교육은 사회를 필연적으로 분극화시킬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카스트(신분) 제도로 국가를 등급화시킨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밖에서 거의 모든 지식을 얻는다. 학교 안에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몇몇 부국에 있어서 사람들의 일생 동안 학교 안에 갇혀 사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  (83, 86, 89쪽)


 우리 살붙이 살아가는 조그마한 살림집 물이 얼어붙은 지 달포가 넘고 두 달이 가깝습니다. 이동안 물을 길어 쓰고, 집에서는 차디찬 물로 설거지를 하면서, 어느새 내 손가락 마디마디 언손이 되고 맙니다. 왜 이렇게 손가락이 시리고 쑤시는가 했더니, 내 젊은 날 강원도 양구 가장 깊은 멧골짝 군대에서 스물여섯 달을 보내던 때에 겪던 일과 똑같은 일이 새삼스레 찾아왔습니다. 얼음생채기입니다.

 오늘 아침 비로소 내 손가락이 어떠한 줄을 깨닫습니다. 둘째를 밴 옆지기가 몸이 몹시 힘들어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비로소 잠들었는데, 새근새근 자는 옆지기가 깨어날 낮나절 지아비 손가락이 어떠한가를 얘기해 주어야 말아야 하나 망설입니다. 옆지기가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잠들었으니, 지아비는 그동안 잠을 거의 못 잔 채 누웠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서야 비로소 두 발 뻗고 잘 수 없습니다. 아픈 손가락으로 찬물을 받아 쌀을 씻어 놓습니다. 오늘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서 먹을 밥을 마련해야 합니다. 밥을 먹이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밤새 나온 오줌기저귀 빨래를 해야 합니다.

 제가 돈없이 살아가니 겨울날 집안 물이 얼어붙는다 할 수 있으나,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집살림을 옳게 건사할 줄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서른일곱 나이인 탓에 이렇게 되고 맙니다.

 군대라는 곳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재주를 배우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일은 너무 슬픕니다. 저는 우리 둘째가 사내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빕니다. 제아무리 착하고 참다운 아이일지라도, 군대에 끌려가 사람 죽이는 재주를 익히며 길들어야 한다면, 그 착하며 여린 마음에 얼마나 깊은 슬픔을 아로새겨야 할까요.

 그러나, 깊으며 괴로운 슬픔을 아로새기기 때문에 더욱 착하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기운을 얻기도 하겠지요.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뭇 들풀처럼.

 그래, 저는 군대라는 데에서 사람 죽이는 숱한 재주를 몸에 사무치도록 배우는 한편, 군대에 가기까지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겪지 못했던 온갖 일을 했습니다. 군대에서 비로소 시멘트와 자갈과 모래와 물을 섞어 비빔질을 하는 일을 배웠고,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는 일을 익혔으며, 곡괭이질은 어떻게 해야 하고, 짐은 어떻게 날라야 하며, 멧길과 눈길은 어떻게 오르내려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학교에서는 안 가르치는 숱한 삶을 외려 군대에서 배웠습니다. 어쩔 수 없겠으나, 군대는 사람을 죽이는 모진 곳이면서도 이곳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서, 모진 죽음과 죽임이 판치는 가운데에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몸부림이 꼬물꼬물 꼬리를 치면서 이런저런 ‘사람이 사람다이 살 길’을 서로 나누면서 보여주었습니다.


.. 교육이 국민문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제도에 강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전 인구를 이에 동원해야 할 것이다. 학습 및 교육에 자기의 능력을 행사하기 위한 개개인의 평등한 권리는 현재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들에게 점유당하고 있다. 반대로 능력 발휘는 학교 내로 제한되고 있다. 그 결과 일과 여가는 서로 괴리되고 있다 … 의무교육의 존재가 바로 사회를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특정한 시간대·특정한 과정·특정한 처지나 전문직업은 학술적이고 교육적인 것이고, 기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사회 현실을 구분하는 학교의 권력엔 한계가 없어서 교육은 비세속적인 것으로 되고, 비교육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  (99∼100쪽, 102쪽)


 저는 우리 옆지기를 좋아하고 우러릅니다. 좋아하면서 우러릅니다. 우리 옆지기를 비롯해서 제가 좋아하며 우러르는 사람들은 우리 옆지기처럼 학교를 덜 다닌 사람이거나 일찍부터 뛰쳐나온 사람입니다. 또는, 학교를 이냥저냥 다니면서도 학교와 사귀지 않던 사람입니다.

 학교와 사귄 사람들은 어쩐지 말을 섞기 버겁습니다. 학교와 살가운 사람들은 어쩐지 동떨어진 별나라 사람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하고 처음 만나서 이름을 나누고 할 때에 “학번이 어떻게 되셔요?” 하고 물을 때면, 그저 빙긋 웃으며 “저는 고등학교만 나와서 그런 건 잘 모르겠네요.” 하고 대꾸합니다(고등학교만 마쳤으니 학번을 알 턱이 없어요). 저는 학교가 참 싫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삶을 가르치거나 나누거나 물려주는 어른은 되고 싶지만, 교원자격증을 따고 무슨무슨 대학졸업증을 거머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선생님도 싫고 교사도 싫습니다. 그저, 우리 아이한테 ‘아버지’라는 이름이듯, 뭇 아이들 앞에서는 ‘아저씨’라거나 ‘어른’이고픕니다. 저는 우리 아버지가, 저를 비롯해 뭇 아이들 앞에서 똑같이 ‘할아버지’이면서 ‘어른’인 삶으로 마지막 고운 나날을 맞이하고 누리신 다음 아주 흐뭇하게 웃으면서 흙으로 돌아가실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4344.1.3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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