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나누는 기쁨 ㉠ 글과 그림과 사진
― 한 사람으로 서며 이웃을 사랑하다
강운구 님 사진이야기 하나 새로 나왔습니다. 진작부터 이런 책이 나와야 했지만, 아직 한국 사진밭은 그리 깊지 못한 탓에 이제서야 한 권 나옵니다. 강운구 님이든 주명덕 님이든 윤주영 님이든, 나라안에서 손꼽을 만한 사진밭 어르신들은 당신이 온삶을 들여 일구어 온 사진을 놓고 ‘사진이란 무엇인가’하고 ‘내가 찍은 사진이란 무엇인가’에다가 ‘내가 보거나 읽는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알뜰살뜰 풀어 놓아 주실 때에 아름답습니다. 젊은 사람이나 아직 어리숙하다 할 풋내기나 새내기 사진쟁이는 사진 한길 오래도록 걸어간 어르신들 땀방울을 고맙게 받아먹으면서 한결 씩씩하거나 튼튼히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며 어른이 아이 앞에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은 따분합니다. 이른바 훈계는 아이한테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아이들은 옛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냥 이야기를 좋아해요. 어른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야기, 어른들도 아이였을 적에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이야기, 어른들은 무슨 놀이를 즐겼나 하는 이야기, 어른들이 좋아하는 삶이란 무엇이라는 이야기 들을 아이들한테 ‘훈계나 교훈이라는 허울’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이야기’라는 따스함으로 조곤조곤 오순도순 아기자기 소근소근 도란도란 들려줄 때에 아름다우면서 도움이 됩니다. 《강운구 사진론》은 이와 같은 이야기책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기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다만, 책이름이 너무 딱딱한데요, “강운구가 즐긴 사진”이라든지 “사진을 찍는 즐거움”이라든지 “사진과 살아온 기쁨”처럼 수수하게 붙이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선물을 베푼다면 더 좋았으리라 싶어요. 왜냐하면 사진을 하는 분들한테 강운구 님 이름은 드높기도 하지만, 사진을 하는 분들 가운데 강운구 님 이름 석 자 모르는 사람 또한 많거든요.
강운구 님 사진을 알거나 강운구 님 이름을 안다 해서 강운구 님이 내놓은 작품을 더 잘 헤아리거나 읽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진을 하는 마음이 아름다울 때에 강운구 님 사진작품도 알뜰히 헤아리거나 읽거나 받아들여요. 이름난 분들 작품이라서 더 좋아할 수 없습니다. 이름없는 이들 작품이라서 하찮게 여길 수 없어요. 우리는 오로지 사진으로만 바라보고 사진으로만 읽습니다. 서로서로 계급이나 신분으로 나누지 않고, 오직 사람으로 껴안거나 어깨동무하며, 그예 사람으로 사랑하거나 믿습니다. 내 삶을 꾸리지, 겉치레를 하지 않아요.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읽거나 씁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거나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찍거나 읽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때에, 황순원이나 박수근이나 임응식을 안다 해서 글을 더 잘 쓰거나 그림을 더 잘 그리거나 사진을 더 잘 찍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을 모른다고 글을 더 잘 쓰거나 그림을 더 잘 그리거나 사진을 더 잘 찍지도 않습니다. 대학교를 마쳤건 유학을 다녀왔건 아랑곳할 일이 아닙니다. 내 삶을 어떻게 다스리면서 내 길을 어찌 걷는 가운데 내 벗과 살붙이랑 어떠한 결로 어우러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벨라스케스를 아는 그림쟁이가 그림을 훌륭하게 그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를 모르는 그림쟁이는 벨라스케스가 베푸는 선물을 받아먹지 못합니다. 벨라스케스가 베푸는 선물을 받아먹지 못할지라도 그림은 알뜰히 그릴 만합니다. 아흔 가까운 나이에도 수채그림을 즐기는 박정희 할머님을 모른대서 그림을 못 그릴 까닭 없습니다. 그러나 아흔을 앞둔 그림쟁이 할머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거나 이분한테서 그림을 배우고자 말미를 마련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서 또다른 선물을 받아먹습니다.
벨라스케스는 내 어머니하고 같다고 여깁니다. 아흔을 앞둔 그림 할머님은 내 아버지하고 같다고 생각합니다. 벨라스케스를 헤아리듯 내 어머니를 헤아리고, 그림 할머님을 톺아보듯 내 아버지를 톺아봅니다. 꼭 이름난 글쟁이·그림쟁이·사진쟁이를 알아야 하지 않아요. 내 둘레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거나 아낄 사람을 알아보면서 껴안을 줄 알면 넉넉해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내 글에 담을 사람이나 삶을 꾸밈없이 껴안으면 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내 그림에 싣는 사람이나 삶을 너그러이 감싸안으면 되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내 사진에 넣을 사람이나 삶을 아리땁게 보듬으면 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쿠델카를 읽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조반니노 과레스키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데즈카 오사무를 읽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아름다운 넋으로 아름다운 꿈을 아름다운 삶으로 일구거든요. 내 이웃을 알려고 가까이하거나 사귀듯, 유진 스미스이든 구와바라 시세이이든 가까이하거나 사귑니다. 내 살붙이를 헤아리거나 아끼듯, 전민조이든 이해문이든 헤아리거나 아낍니다. 내 어버이를 사랑하거나 믿듯, 기무라 이헤이이든 토몬 켄이든 사랑하거나 믿습니다.
글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기에 그림과 사진을 아울러 좋아하거나 사랑합니다. 그림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기에 글과 사진을 함께 좋아하거나 사랑합니다.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기에 글과 그림을 좋아하거나 사랑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내 한길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삶을 예쁘게 건사하고픕니다. 글만 쓸 수 없고 그림만 그릴 수 없으며 사진만 찍을 수 없습니다. 글만 읽거나 그림만 읽거나 사진만 읽을 수 없습니다. 빨래도 하고 밥도 하며 설거지도 합니다. 아이도 돌보고 아이랑 놀며 아이를 씻깁니다. 옆지기하고 사랑하며 옆지기 아픈 곳을 주무르는 가운데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집살림을 꾸리고 이웃살림을 돌아보면서 서로 도울 만한 일은 돕고, 도움받을 일은 도움받습니다. 나 스스로 예쁜 한 사람으로서 내 삶터에 씩씩하게 두 다리를 버티고 섭니다. 다만, 나는 사진쟁이인 까닭에, 내 이웃하고는 꼭 한 가지, 내 손에 언제나 사진기를 쥐는 대목 하나만 다릅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