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는 내 삶


 꽁꽁 얼어붙던 물이 녹는다. 드디어 우리 집 씻는방에서 한 차례 씻고 나서 빨래를 한다. 밀린 모든 빨래를 다 하지는 않는다. 이듬날 일어나서 밤새 나올 아이 기저귀 빨래를 함께 하자고 생각한다. 밀린 설거지도 한다.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흐뭇하다. 물이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알뜰하며 고마운가. 빨래를 하는 즐거움을 듬뿍 느끼면서 하루라도 빨래를 하지 않으면 손바닥에 가시가 돋겠다고 생각한다. 살림하는 집에서 물이란, 밥하기 빨래하기 설거지하기, 여기에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치기, 아이 씻기기, 이렇게 곳곳에 아주 알뜰히 쓸 뿐 아니라, 이 여러 곳에 물을 쓰지 못하면 답답한 나머지 숨이 막힌다. 몇 바가지 물을 힘겹게 떠 와서 어렵게 쓰던 나날 얼마나 등허리가 휘며 고달팠던가.

 잔뜩 밀린 일을 얼추 마친 저녁나절, 며칠 앞서 겨우 장만한 《우주소년 아톰》 1권을 펼친다. 《우주소년 아톰》 첫머리는 〈아톰대사〉 이야기이다. 〈아톰대사〉를 읽으며 이 만화가 1960년대에 그린 만화가 맞을까 싶어 크게 놀란다. 이무렵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누가 있었을까. 제 앞가림과 밥그릇에 바쁜 나머지 제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찌 흐르는가를 잊던 나날이 아닌가.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를 구석이 없는데, 〈아톰대사〉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이 지구별에서 끔찍하달 만큼 물질문명에 빠져들면서 그만 지구별은 꽝 하고 터졌고, 꽝 하고 터지기 앞서 사람들은 우주배를 만들어 ‘지구별과 같은 삶터’가 우주 다른 데에 있을까 꿈꾸며 떠난다. 이들 우주배를 타고 길을 떠난 사람들은 자그마치 이천 해씩이나 우주를 떠돈다. 이천 해나 우주를 우주배에 타고 ‘중력 없는 채’ 떠돌면서 몸은 아주 다르게 바뀌고, 무엇이든 우주배에서 만들어서 쓴다.

 아톰 만화가 이런 이야기였구나 하고 새삼 깨달으면서 한 가지가 궁금하다. 우주배를 타고 우주를 떠도는 사람들은 물을 어떻게 마실까. 물을 화학방정식으로 엮어서 만들려나. 우주배를 타고 우주를 떠돌 때에는 물이 없어도 살 수 있을까. 우주배를 타고 우주를 떠도는 사람한테는 중력이 없으면, 이들은 옷이 더러워질 일이 없어 옷을 안 갈아입고 살아가려나. 우주배에서는 옷을 어떻게 지어서 입지? 흙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을 텐데, 먹을거리는 어떻게 마련하려나? 아주 많은 사람들은 아이한테 엄마젖이 아닌 소젖이나 가루젖을 먹이는데, 흙이 없어 농사도 지을 수 없는 판에 짐승은 어떻게 먹여 키우고, 이들 짐승이 우주배에서 살아갈 수 있기는 할까?

 빨래기계가 있으면 빨래할 걱정이라든지 빨래하며 손바닥에 굳은살이 큼직하게 박혀 아프다든지 빨래할 겨를이 빠듯하다든지 하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마, 빨래기계를 쓰는 동안 물을 얼마나 쓰는지조차 알 길이 없으리라. 빨래기계 아닌 손으로 빨래를 하기에 물을 얼마나 쓰는가를 헤아리고, 물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깨닫는다. 남이 해 주는 밥이 아니라 내가 차려서 식구들을 먹이는 밥인 만큼, 물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 생각하고, 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살핀다.

 이원수, 예용해, 성내운, 한창기, 송건호, 임길택, 고정희, 박경리, 이오덕, 전우익, 권정생 같은 분들은 글을 쓸 때에 셈틀을 쓰지 않았으리라 본다. 올해에 이분들 뒤를 따라 흙으로 돌아간 리영희 님도 똑같지 않으랴 싶다. 셈틀은커녕 타자기조차 안 쓰는 삶이었으리라 본다. 그래도 이분들은 하나같이 글을 바지런히 퍽 많이 써 냈다. 손이 아닌 기계 힘을 빌어 글을 쓴다면 훨씬 빨리 더 많이 글을 쓰겠지. 그러나 기계 아닌 내 손에 맡기고 내 몸뚱이를 움직이며 글을 쓰는 맛은 크게 다르다. 틀림없이 손글은 기계글보다 덜 쓸밖에 없고 더디 쓸밖에 없다. 그러나 손빨래를 하고 손일로 밥차리기를 하듯, 손글씨로 글을 하나 내놓을 때에는 내 삶을 내가 다스리거나 추스르거나 북돋운다고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 기계를 쓴다 해서 이런 느낌이 아예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손글 쓰기란 온몸과 온마음을 힘껏 바쳐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 스스로 한 사람이 되는 일이요, 나부터 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이다.

 손을 써서 텃밭을 일구고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린다. 손으로 사랑하는 짝꿍 살결을 쓰다듬거나 퉁퉁 붓는 발과 다리를 주무른다. 손으로 빗자루를 들고, 손으로 물건을 나르며,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다. 나한테는 손빨래 같은 갖가지 집살림 일하기가 바로 책읽기이다. (4343.12.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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