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만 원, 육십만 원


 사흘 밤을 인천하고 서울에서 자면서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마실을 했다. 하루를 잤으나 허리와 다리와 허벅지와 등짝 어느 하나 성하지 않은데다가 뭉치거나 굳은 힘살이 풀리지조차 않는다. 집에는 물이 얼었다. 물이 얼었다기보다 땅속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양수기가 얼어터진 듯하다. 왜냐하면, 전깃줄을 꽂아 물꼭지를 올리면 양수기가 위잉 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아뭇소리가 안 났다. 바보처럼, 처음 집에 돌아오자마자 물이 얼었는가 그대로인가를 살폈어야 했는데, 그만 마음을 놓았다. 물이 언 줄 알았다면 씻는방 물꼭지를 그대로 두면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물이라도 받을 만했는데.

 참 어림없이, 아니, 어처구니없이 사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양수기 고치거나 새로 하는 데에 드는 돈은 사십만 원이라 한다. 얼씨구나, 돈벌이가 형편없는 주제에, 아니 돈벌이가 마땅히 없는 주제에 돈은 잘도 솔솔술술 새어나가네.

 더욱이, 이번 서울마실과 인천마실을 하며 쓴 책값을 헤아리니 육십만 원이 살짝 웃돈다. 드디어 ‘우리 말 이야기’ 다룬 둘째 책이 나왔기에, 출판사에다가 글삯으로 30만 원을 넣어 주고, 나머지는 책으로 부쳐 달라 하면서, 이 삼십만 원으로는 데즈카 오사무 아톰 스물 몇 권에다가 초기 에스에프 대표작에다가 잔뜩 사들였다. 여기에, 쿠델카 사진책 십일만 원짜리랑 로버트 프랭크 사진책 육만오천 원짜리랑 아키라 사진책 십만 원짜리를 샀다. 옆지기는 뜨개 책으로만 이십만 원 가까이 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애 아빠는 혼자서 생각했다. 섣불리 옆지기한테 말을 섞지 못했다. 그러나 한 마디는 했다고 떠오른다. “인천에서 살 때에는 어림도 없을 책들을 시골로 와서 잔뜩 사네요.”

 그렇다. 인천에서 집삯 삼십오만 원에다가 도서관삯 삼십오만 원을 다달이 내며 살았다. 이렇게 세 해 반을 인천에서 ‘살아’ 냈다기보다 ‘버티어’ 냈다. 시골집에서는 집삯이든 도서관삯이든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마땅한 벌이가 용하게 뚫린 삶은 아니다. 고작 ‘칠십만 원이 술술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만 다달이 ‘칠십만 원에 가까운 돈을 책값으로 쏟아붓’지 않나 싶다.

 옆지기도 느낄 테지. 나도 느낄 테고, 아이도 느낄 테지. 이 나라에 우리처럼 살아가는 식구가 있으려나? 다른 나라에는 우리처럼 지내는 식구가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난다. 아이를 안고 무거운 가방 등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외버스에서 옆지기는 곯아떨어져 잠들었는데 아빠는 혼자 웃고 만다. 그래도, 어찌저찌 밥 안 굶고 잘만 사는걸. 우리는 우리 삶을 밝히는 좋은 책을 마음껏 만날 뿐 아니라, 우리 넋을 밝히는 좋은 이웃하고 살가이 마주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지내는걸.

 양수기 값 사십만 원에 벌벌 떨밖에 없고, 올겨울 기름값으로 얼마나 나가야 하나 걱정스러울밖에 없다. 다만, 좋다. 세 식구에다가 네 식구가 될 이듬해 우리 살림살이는 한결 쪼들릴 텐데, 그래도 좋다. 이 책들을 하나하나 보듬으며 오늘 하루도 좋다. 그나저나 등허리가 몹시 결리다. 큰일이다. 하루 더 자고 나서는 좀 나아져야 할 텐데. 얼음길에 빨래하러 또 물 길으러 멧중턱 이오덕학교까지 오르내리자면 죽어나겠다. (4343.12.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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