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글쓰기


 아침부터 보슬보슬 내리던 눈은 낮이 되니 가물가물합니다. 한낮을 지나면서 눈발은 새삼스레 굵어지고, 눈발이 굵어지면서 멧자락 나뭇가지에도 눈이 한 켜 두 켜 쌓입니다. 참말 겨울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고단한 나머지 낮잠을 잡니다. 실컷 잠을 자고 난 뒤 벌떡 일어납니다. ‘오늘 볼일 보러 마실을 떠나야겠어! 인천까지 가서 골목 사진을 찍어 볼까? 그때까지 눈이 안 녹으려나?’ 길을 나서기로 마음먹으며 아이한테 물어 봅니다. “아빠하고 이야 갈래?” “아빠하고 갈래.”

 옆지기는 아이한테 옷을 입히고, 아빠는 짐을 꾸립니다. 시골버스 타는 때에 맞추어 일찌감치 집을 나서고, 천천히 아이랑 거닐면서 눈 펄펄 내리는 시골길을 사진으로 한 장 두 장 담다가는 아이하고 마음에 살포시 담습니다. 시골버스를 기다리며 아이랑 걸상에 나란히 앉습니다. 눈길 때문에 길이 막히는지 버스는 늦고, 자그마한 버스역은 꽤 춥습니다. 버스는 손님 두 사람을 태우고 들어옵니다. 막역이자 첫역인 광벌 버스역에서 아이를 안고 탑니다. 아이랑 함께 “안녕하셔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시골버스는 눈 내리는 시골길을 천천히 천천히 달립니다. “이야, 벼리야, 저 눈 좀 봐. 온통 눈나라야. 나무에도 눈이고 하늘에도 눈이야. 산에도 눈이고 구름도 눈이야. 나뭇가지마다 눈이 가득 앉았지?”

 시골버스는 멧자락 사이 조그마한 길을 따라 달리고, 숯고개를 넘어 너른 못물을 지나 읍내로 들어섭니다. 읍내도 멧자락처럼 눈이 소복히 덮였으나 멧자락만큼 하얗지는 않습니다. 16시 30분에 동서울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16시 28분에 읍내 버스역에 닿습니다. 얼른 표를 끊습니다. 버스는 아직 안 들어옵니다. 1분 뒤 16시 29분에 버스가 들어오고, 표를 내고 자리에 앉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스는 부릉부릉 하면서 움직이고, 찬찬히 달려 다른 읍내 두 군데를 거쳐 다른 손님을 태우고 나서 고속도로로 들어섭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눈발은 더 굵어지고, 서울하고 가까워질수록 바깥은 하얀 눈나라 아닌 잿빛 시커먼 누리입니다.

 눈 때문에 길이 막히는 고속도로를 겨우 벗어나 서울로 들어섭니다. 아이는 버스역에 닿을 때까지 아빠 무릎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들어 줍니다. 가방을 메고 짐을 꾸려 아이를 안고 내리려 하니 비로소 잠에서 깹니다. 아이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내내 칭얼거립니다. 아빠는 아이를 안고 어르며 전철을 탑니다. 숱한 사람으로 꽉 들어찬 전철인데 ‘노약자장애인영유아보호자동반자석’이라는 이름이 길게 붙은 자리가 비었습니다. 용케 사람들이 이 자리를 비워 주었습니다. 품에 안은 아이를 살짝 내리고 등에서 가방을 풀어 한쪽에 앉은 다음 아이를 무릎에 앉힙니다. 전철이고 버스이고 길이고 어디이고, 서울은 사람들이 몹시 많아 서로가 서로를 따스히 살피거나 보듬거나 아끼지 못합니다. 숨막히고 시끄러우며 골아픈 전철을 한창 달리는데 “물. 물 줘.” 하고 아이가 말합니다. 마침 물 하나는 가방에 안 챙겼습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을지로4가에서 전철을 내려 자판기로 물을 삽니다. 조막만 한 플라스틱병이 600원입니다. “벼리야, 여기 물 되게 조그마한 녀석이 되게 비싸다.”

 다시 전철을 탔다가 신촌역에서 내립니다. 사람들이 복닥복닥 붐비는 뒷간으로 갑니다. 장애인 칸은 비었기에 이리로 들어갑니다. 뒷간에서 장애인 칸은 장애인이랑 ‘아이를 데리고 찾아드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가방이나 짐이 커야 해서 여느 칸에는 들어가기 아주 힘들어요.

 아이 쉬를 누이고 품에 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눈발이 굵습니다. 눈발은 굵지만 땅으로 떨어지며 쌓이지는 않습니다. 그저 바람에 따라 휘휘 날릴 뿐입니다.

 큰길이든 골목이든 사람이 넘칩니다. 어디에든 사람이 넘치는 서울인 까닭에 어디를 가든 크고작은 가게입니다. 골목 안쪽 헌책방 〈숨어있는 책〉에 들러 책방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책 몇 만 원어치 고릅니다. 다시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습니다. 망원역 쪽으로 갑니다. 이곳에서 출판사 일꾼을 만나려고 오늘처럼 눈 펑펑 쏟아지는 날 일부러 서울마실을 했습니다.

 출판사 일꾼은 먼길 마실을 해 준 두 식구를 오리고기집으로 데려갑니다. 아이는 투정을 부리면서도 밥을 곧잘 받아먹어 줍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고기집에 들고 나는 손님들을 문득문득 바라보니 한결같이 예쁘고 멋스러운 차림입니다. 그런데 시외버스가 동서울역에 닿아 전철을 타고 망원역으로 오기까지 스친 사람들 가운데 우리 아이처럼 빨간 겉옷을 입는다든지 맑거나 밝은 겉옷을 걸친 사람은 하나도 못 보았습니다. 때마침 못 볼 수 있을 테지만, 사람들 옷차림은 모조리 어두컴컴합니다. 도시 빛깔 잿빛마냥 잿빛이거나 까망이기 일쑤입니다. 하얀 겨울에 맞추어 하얀 겉옷인 사람조차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도시에서 지낼 때에는 하얀 빛깔 옷을 입으면 때가 너무 잘 타 자주 빨아야 해요. 처음 입은 몇 시간은 하얀 빛깔이 고울 테지만 금세 허여멀겋게 바뀔 테지요. 맑은 빛깔이나 밝은 빛깔 옷 또한 어슷비슷하겠지요. 흙이나 자연이나 나무나 풀이 마음껏 자라나면서 자연스러운 빛깔과 내음과 무늬가 있기 어려운 도시일 뿐 아니라, 그나마 공산품 물건으로도 맑거나 밝은 빛깔은 마주하기 힘듭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잎사귀랑 노란 잎사귀조차 마주하지 못하는데, 겨울철에도 하얀 눈송이마저 마주하지 못합니다. 하얀 눈송이를 하얀 눈송이 그대로 마주하며 곱게 쌓이도록 안 하고, 염화칼슘을 길마다 잔뜩 뿌리면서 땀 뻘뻘 흘려야 하는 도시입니다. (4343.12.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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