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유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내 삶은 내가 사랑해야 아름답다
 [책읽기 삶읽기 29] 유미리,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일본책 이름은 “私語辭典”이었으나 한국책 이름은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인 유미리 님 산문책을 읽다. “내 말 사전”이랑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느낌이요 흐름이요 이야기일 텐데, 왜 한국책에는 이런 이름이 붙을까. 누가 이런 이름을 붙였으려나. 문학을 하는 유미리 님은 ‘국어사전(일본에서 살아가니 일본어사전이라 하겠지)에 풀이된 말뜻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고 여겨, 당신이 살아온 나날을 곱씹으면서 “내 말 사전”이라는 책이름을 붙였을 텐데, 한국책에서 책이름을 좀 고쳐서 멋스러이 보인다든지 눈에 뜨이게 한다든지 책 좀 팔아 보겠다든지 한달지라도, 작은이름으로 “내 말 사전”으로 나왔던 책임을 알아보도록 해 주어야 옳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옅은 빛 잔 글씨로 “The Private Glossary”라 적히기는 했구나. 그런데 일본책에는 이런 영어가 아닌 한자로 책이름이 적었잖은가.


.. 사랑이란 “피를 흘릴 만큼 타자에게 관여하는 일”이란 정의도 있을 수 있다. 사전에는 인생이 없다 … 진상을 폭로해 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진상 따윈 들을 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모두들 진상보다는 소문을 좋아하는 것이다 … 남의 편지(마음)를 훔쳐보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서 얼마 후 그와 헤어졌다 ..  (8, 40, 56쪽)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책이름을 놓고 궁시렁거려 본다. 왜냐하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에는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라는 말마디하고 유미리 님 삶하고는 그닥 이어졌다고는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미리 님은 당신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즐긴다. 더도 덜도 아닌 당신 고운 삶임을 헤아리며 받아들인다. 싫든 좋든 고맙든 달갑잖든 하루하루 목숨줄을 잇는다. 그렇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프던 나날이 길었던 만큼, 또 이런 나날이 있었던 만큼, 이와 같은 나날 이야기를 조곤조곤 적바림한다.

 누구한테 드러내 보이려고 적바림하는 글이 아니다. 그예 쏟아지는 글이다. 누구한테 알린다거나 참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고 밝히는 글이 아니다. 그예 살아가는 하루하루 틈틈이 솟아오른 글이다.

 조그마한 사람으로서 조그맣게 살아가는 유미리 님이라고 느낀다. 수수한 사람으로서 수수한 삶을 보듬는 유미리 님이라고 여긴다. 당신한테 글쟁이나 문학꾼이라는 이름표를 붙이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나 흔히 보는 여느 ‘애 엄마(이 책을 내놓을 때에는 아가씨)’이다. 잘날 구석이 없으나 못날 구석도 없는 소담스러운 목숨이며 삶이다.

 문득 궁금하기는 하지만, 또 앞으로는 어떠할는지 모르는데, 유미리 님이 도시 한복판 사람이 아니라 시골 한구석 사람이라면 어떠한 글을 쓰려나. 아이와 둘이서 꾸리는 삶은 어떠한 결 어떠한 무늬 어떠한 빛깔일는지 궁금하다. 이제 아이가 제법 컸을 텐데, 아이하고 어떤 이야기를 어떤 살림살이로 주고받는지 궁금하다.

 당신이 배를 앓으며 낳은 아이를 젖이 아프도록 물리고 몸이 고되도록 돌보면서 키우는 나날을 어찌 돌아보는가 궁금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유미리 님 다른 산문책 《생명》에 잘 나왔으리라 본다. 《생명》도 곧 읽을 생각인데, 2000년에 나온 작품 《생명》이 아니라, 2010년이나 2011년 삶자락 목소리를 듣고 싶다.


.. 나는 여자를 싫어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던 탓일까 … 내가 처음으로 성욕을 느낀 것은 몇 살 때였을까. 성교가 아니라, 사람과 몸을 나누고 싶다, 누군가 나를 만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라면 아주 오랜 옛날부터 품고 있었다 … 나는 여자와 작가를 양립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런 데다 엄마나 아내 역할까지 하라고 하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  (18, 34, 99∼100쪽)


 아이하고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한 주 이레, 한 달 서른 날을 꼬박 붙어 지내는 동안, 웃고 떠들며 안고 어르기도 하지만, 이맛살 찌푸리며 꾸중을 하기도 한다. 아이 엄마 말마따나 아이 아빠는 아이 눈높이하고 똑같거나 어쩌면 아이 눈높이보다 낮기 때문에 아이한테 토라지기까지 한다. 하기는, 아이한테 골을 부리는 아빠란 어디에 있을까. 아빠가 아이를 달래기도 하지만, 아이가 아빠를 달래기도 한다. 아이랑 아빠가 다르다면, 아빠는 아이가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가 입을 옷을 빨며 아이가 잠들 잠자리를 추스른다. 아빠는 아이를 수레에 태워 자전거를 달리고, 아이가 먹을 밥거리를 벌어서 값을 치르며, 아이가 누릴 물건을 가방에 짊어지고 다닌다.

 아빠라는 자리는 어떤 삶일까. 엄마라는 자리는 어떤 삶이려나. 아이라는 자리는 또 어떠한 삶인가.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내가 아이였을 적을 늘 돌이킨다. 아이와 복닥이면서 내가 아이하고 복닥이는 이 느낌이, 내가 아이만 한 나이였을 때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는 어떠했고, 우리 옆지기는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는 어떠했으려나 하고 곱씹는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읽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 삶을 읽을 텐데,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서로 제 삶을 여민다. 유미리 님 산문책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를 읽으며 유미리 님 삶을 돌아보는 가운데 내 삶을 돌아본다. 유미리 님은 유미리 님대로 일본땅에서 ,나는 나대로 한국땅에서, 저마다 슬기로우며 즐거운 하루하루를 맞이할 노릇이라고 느낀다.


.. 여성은 어디서든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눈썹, 복사뼈, 엉덩이 사이에서도 … 성은 환상에 지배되기가 예사인데, 여자들이 남자들의 환상을 받아들여 악전고투하는 꼴은 어째 좀 이상하다 … 나 자신은 욕망이 강한지 약한지 잘 모른다. 내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청소기도 없다. 전기밥솥도 없다. 일반적인 집에는 흔히 있는 것이 없는 셈인데, 별로 갖고 싶은 생각도 없다. ..  (48, 71, 118쪽)


 번역은 영 마땅하지 않다. 첫머리부터 “말을 사용(使用)한다(7쪽)”라 적바림하더니, 마지막까지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感謝)를 드립니다(182쪽)”라 적바림한다. 이렇게 번역을 해도 될까. 이런 번역도 번역이라 할 만한가. 이 책을 옮긴 한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 우리네 번역은 이러한 말굴레에서 허덕이는지 슬프다. 왜 우리네 창작꾼이나 번역꾼은 우리 말글을 조금 더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하는지 서글프다. 왜 우리네 문학은 더욱 넉넉하며 푸진 말잔치가 아니라, 더욱 쪼그라들거나 짓눌린 말다툼으로 그치는지 서운하다.

 “섹스는 의사(擬似)적인 죽음이며(23쪽)”는 번역이 아니다. 일본글을 우리 말이 아닌 한글로만 적은 글이다. “실제와 비슷하다”는 뜻이라는 ‘擬似’인데, 일본사람이 쓰는 일본말 ‘의사적’을 굳이 고스란히 살려야 하는지 아리송하다. 홍세화 님은 우리 말로 ‘너그러움’이라 하지 않을 뿐더러, 한자말로 ‘관용’이라고도 않고 프랑스말 ‘똘레랑스’를 쓰고 말았다. 번역쟁이이든 지식꾼이든 이런 말은 섣불리 쓰면 안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눌 말을 써야 옳다. 여느 사람들과 수수하며 수월하게 주고받을 말을 깨달아야 아름답다. “화제(話題)의 대상(對象)으로 삼는다(73쪽)” 같은 말마디는 “이야깃거리로 삼는다”라 하면 넉넉하고, “(죽고 만 고양이) 검둥이의 존재감(存在感)을 불식(拂拭)할 수 없을 것 같다(42쪽)”는 “(죽고 만 고양이) 검둥이를 내 마음에서 지울 수 없을 듯하다”로 다듬어야 알맞다고 느낀다. “우리 부모님”이라 했다가 “나의 어머니(153쪽)”라고 적바림한 번역은 귀엽다고 해야 할까나. 그나마 “나의 부모님”이라 하지 않았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려나. 창작이든 번역이든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다스리지 못하면, 이렇게 책으로 엮은 문학을 읽는 사람한테 얄궂은 말버릇이 퍼진다. 얄궂은 말버릇은 아주 더디 차근차근 스민다. 어느 하루 갑작스레 확 바꾸지 않는다. 차츰차츰 젖어들도록 이끈다.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라는 산문책이 유미리 님한테는 “내 말 사전”임을 헤아린다면, 이러한 산문책을 우리 말로 옮길 때에 ‘어떤 우리 말’로 옮겨야 하고, 얼마나 글을 더 가다듬거나 손보아야 하는가를 한결 깊이 살피며 돌아보아야 한다고 느낀다. 글 한 줄과 낱말 하나 더욱 마음을 쏟아 바로잡거나 어루만져야 한다고 느낀다.


.. 한국에서 온 유학생 A가 다니는 대학교에 놀러 갔을 때, A의 친구와 함께 전철을 타게 되었다. 그 친구가 이름을 묻기에, “유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럼 한국사람?” “네.” “한국사람치고는 일본말 굉장히 잘하네요.” “일본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럼 일본사람이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재일한국인 2세인데요.” “그게 무슨 소리죠?” 나와 A는 어리둥절하여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는 재일한국인이란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67쪽)


 유미리 님이 재일한국인(또는 재일조선인, 또는 그냥 한겨레)이 아니었다면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같은 책을 쓸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일본사람으로 살았어도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같은 책을 쓸는지 모르는데, 그때에는 이 책에 실을 이야기가 아주 다르겠지. 아니, 재일한국인이 아닌 ‘일본사람’ 눈으로 ‘한국에서 온 유학생 아무개’가 참 바보스럽거나 어리숙한 줄을 깨닫는다면 어떤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한국 역사를 아는 일본사람이 한국 역사를 모르는 한국사람을 마주할 때에는 어떤 느낌일까. 아무래도, 일본 역사를 아는 한국사람이 일본 역사를 모르는 일본사람을 마주할 때하고 엇비슷한 느낌일까. 꼭 같지는 않을 터이나 살짝이나마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낄까.

 “자기 과거의 비참한 사건을 재산이라고 여기는 감각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151쪽).”라는 대목에 마지막으로 밑줄을 긋는다. 책은 세 번째 읽으며 꼭 덮는다. 이제 이 책은 오래오래 가슴에 묻자. 유미리 님 다음 산문책을 읽자.

 우리 집 딸아이는 앞으로 열 해쯤 제 엄마 아빠랑 함께 살아가고 나서 이 책을 들출 수 있겠지. 아쉽게 판이 끊어졌으나 아버지가 이 책을 고이 장만해서 예쁘게 읽은 다음 잘 건사해 놓을 테니까,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아보기 힘들 2020년에도 반갑게 마주할 만하리라 본다. 그나저나, 2020년이나 2030년에는 유미리 님 산문문학을 한국땅 사람들이 어떻게 돌아볼까 궁금하다. 유미리 님이 환갑 나이를 넘어선 뒤에는 한국땅 사람들은 이녁 문학을 어떻게 살피며 곱씹을는지 궁금하다. (4343.12.8.물.ㅎㄲㅅㄱ)


―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유미리 글,김난주 옮김,민음사 펴냄,2000.4.24./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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