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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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석제 님한테 ‘기록하고픈 삶’이란?
 [책읽기 삶읽기 7] 성석제, 《농담하는 카메라》



 소설쓰는 성석제 님이 쓴 산문책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다. 책날개를 펼치니 성석제 님이 사진기와 사진찍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찬찬히 나와 있다. 그래, 책이름부터 “농담하는 카메라”이니 사진과 얽혀 성석제 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풀어내지 않았으랴 생각하며 집어들었다.

 언제였더라 《헌책방에 관한 명상》이라는 책을 낸 분이 있다. 책이름에 끌려 하마터면 이 책을 살 뻔했는데, 헌책방이라는 책쉼터를 제대로 즐기며 제대로 글로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섣불리 돈을 치르지 않았다. 먼저 책방에 찾아가 책을 좀 읽어 보았다. 그러니 웬걸, 책이름은 “헌책방에 관한 명상”이라 붙였으나 정작 헌책방 이야기는 한 줄조차 안 적었다. 더욱이 이 책 《헌책방에 관한 명상》은 헌책방을 생각하는 이야기책이 아니라 ‘좀 흔한(?)’ 문학평론이었다.

 책이름에 ‘헌책방’을 넣는다고 반드시 헌책방을 이야기해야 하지는 않는다. 책이름에 ‘자전거’를 붙인다고 꼭 자전거를 말해야 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이름에 ‘카메라’를 적었다고 으레 사진 삶을 다루어야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농담하는 카메라》라는 책은 사진기와 사진찍기 이야기를 첫머리에 잔뜩 적어 놓는다. 이렇게 하면서 몸글에는 사진 이야기는 딱 두 번 나온다. 더군다나 두 번째 사진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카파라치’에게 표시가 불분명한 갓길을 주행하는 장면을 찍혀서 상상도 하지 못한 벌과금을 물었다. 화는 났지만 어떻든 조심하게는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카메라가 미국의 총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과속단속 카메라에 곳곳의 CCTV, 수천만 대의 디카, 휴대전화 카메라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인터넷까지 있는데(291쪽).”이다. 책을 덮으며 혼잣말을 한다. ‘제길, 속았군!’ ‘어어, 이봐, 사진기만이 아니라 펜 또한 총 구실을 한다고.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여러 사람 목숨을 앗지만, 글 또한 섣불리 쓰면 여러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한다고.’

 책을 장만한 돈이 아깝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란 없다. 내 마음을 건드리며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책만 끝까지 읽으려 한다. 내가 책을 장만하는 데에 쓰는 돈은 내 살림돈 가운데 절반 가까이 되니까. 날마다 사들이는 책 숫자는 줄잡아 다섯 권쯤 되니까. 읽다가 ‘제대로 안 살피고 잘못 산 책’이라면 나보고 읽어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다른 책을 읽을 겨를을 빼앗기는 셈이다. 그나마 요사이에는 우리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며 가끔가끔 아빠가 아이랑 ‘안 놀아’ 주고 아빠가 읽고픈 책을 삼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읽는다. 아빠가 저 좋다는 책을 읽고 있으면 아이는 아빠 무릎에도 앉고(앉아서 읽으면) 등이나 허리나 배에도 앉는다(눕거나 엎드려서 읽으면). 언제나 한손에는 볼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데, 아이는 아빠가 손에 쥔 볼펜을 뺏으려 한다. 집에 볼펜이 수십 자루 곳곳에 널려 있는데 그예 아빠 손 볼펜을 뺏으려 하고, 아이는 아빠가 읽는 책에 뭔가 끄적이고 싶어 한다.

 엊그제 《농담하는 카메라》를 억지로 끝까지 읽는 동안 아이는 아빠한테 달라붙지 않는다. 웬일이라니 하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으며 고작 두어 군데 밑줄을 그었을 뿐, 나로서는 ‘널리 이름있고 사랑받는’ 성석제 님 글이 썩 재미나다거나 놀랍다거나 괜찮다거나 읽을 만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책을 읽으며 자주 밑줄을 긋는다든지,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을 빈자리에 신나게 끄적이다 보면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아빠 손 볼펜을 빼앗으려 한다.

 아무래도 나로서는 ‘두 다리나 자전거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자가용 몰기를 즐겨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쓴 책은 못 읽겠다. 내가 바라보는 누리하고 너무 달라서 못 읽지는 않는다. 내가 꿈꾸는 누리하고 글쓴이가 살아가는 터전이 몹시 동떨어지기에 못 읽지도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먹을거리를 사거나 볼일을 보러 다니다 보면, 요즈음은 날마다 ‘차에 밟히거나 치여 죽은 풀벌레와 나비와 잠자리’를 여러 열 마리씩 본다.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쌀쌀한 날씨에 아스팔트 바닥이 따뜻하니까 길가에 앉아 쉬는 메뚜기며 사마귀며 뱀이며 나비며 잠자리며 벌이며 …… 자동차는 아무 느낌이나 아픔조차 없이 이들을 짓밟는다. 자전거를 몰면서 길바닥을 잘 내려다보지 않으면 나부터 이들을 밟을까 걱정스럽다.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다닐 때에는 이 버스한테 밟혀 죽는 풀벌레를 느끼지 못한다. 천천히 달리는 시골버스에서 풀벌레 죽음을 못 느끼는데,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숱한 자가용을 모는 이들은 풀벌레 죽음이나 생채기를 한 번이라도 느끼려는지. 게다가, 내리막길을 달릴 때에 내 앞에서 하느작거리다가 자전거나 내 머리나 얼굴이나 몸에 부딪히는 나비나 잠자리는 맥을 못 추고 풀숲이나 길바닥에 뾰로롱 떨어진다. 고작 자전거에 부딪히고도 크게 다치거나 죽는 풀벌레인데 차에 부딪히면 어찌 되겠나.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시골길을 다니며 풀벌레가 내 몸에 부딪힐 때에는 풀벌레가 다치지 않으나, 기껏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라 하더라도 풀벌레는 크게 다친다. 다만, 오르막을 낑낑거리며 달릴 때에는 잠자리나 나비가 내 자전거 손잡이에 내려앉곤 한다.

 자동차를 몬다고 몹쓸 사람이라거나 못된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동차를 몰기 때문에 ‘우리 누리와 삶터를 더 넓고 깊이 살필 수 없’으며, 이처럼 넓고 깊이 살필 수 없음을 ‘아예 못 느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는 ‘다름’으로 말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른 삶이 아닌 어긋난 삶이다.

 성석제 님은 자동차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맛난 밥’을 먹으러 다닌다. 글솜씨가 꽤 있어 성석제 님 글을 좋아할 만한 분이 많겠다고 느끼지만, 사람들은 성석제 님 글에서 ‘글솜씨’ 말고 무엇을 읽거나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글솜씨와 글재주와 글멋과 글맛에 앞서 다른 무엇인가를 글줄에 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성석제 님은 성석제다운 무엇인가 뜨겁고 넉넉한 매무새를 고이 실어야 하지 않을까. “여름에는 면을 몇 번 뽑기도 전에 주인이 입은 옷이 온통 땀으로 젖어 버린다. 면을 뽑는 건 요리사지만 면이 요리사에게서 뽑아내는 것도 있지 싶을 정도다. 주인은 기계를 쓰지 않는다. 기계를 쓰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자신이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기계를 써서 대량생산을 할 정도로 손님이 많지도 않다. 배달할 사람이 없어 배달도 하지 않는다. 요점은 손으로 면을 뽑아서 음식을 만드는 그곳이 그 면의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193쪽).” 같은 글월을 읽으며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는 어딘가 아쉽다. 무언가 더 해야 할 말을 못했구나 싶고, 사람과 사물을 퍽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할 만하지만 참말 꼼꼼히 들여다보며 쓴 글인지 알쏭달쏭하다. 성석제 님한테 ‘기록하고픈 삶’이란 무엇일까? 성석제 님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다가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써서 책으로까지 내놓아 사람들한테 읽히려 하는가?

 내 오랜 골목동네 단골 중국집에 요즈음은 거의 못 간다. 맛이 없어서 못 가지 않는다. 나같이 바보스러운 단골이 괜히 이 단골집 손맛을 이곳저곳에 알리는 바람에 그만 이 집에 손님이 넘치고 말아, 지난해부터였나 아침 열한 시에서 낮 세 시 무렵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며 먹어야 하는 데로 바뀌었으며, 이곳 일꾼은 저녁까지 쉴 겨를조차 없이 일하며 밥을 못 드신단다. 하도 일이 많고 일손이 밀려 젓가락 설거지조차 못해 나무젓가락을 쓰는데다가, 낮 두어 시면 일찌감치 짜장면이 다 떨어질 뿐더러 저녁 대여섯 시이면 그날그날 마련하는 밥감(음식재료)마저 다 떨어진다. 예전에는 배달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배달을 나갈 엄두를 못 낸다. 요리사나 잡일꾼을 더 둔다면 한결 일이 수월할 테며 덜 바쁠 뿐 아니라 돈 또한 훨씬 많이 벌 테지. 그러나 내 단골 중국집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하겠는가.

 성석제 님이 《농담하는 카메라》라 하는 자그마한 산문책 하나에서 이 모든 실타래와 이음고리를 밝히거나 풀어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타래를 풀지 않고서야 성석제 님 당신 삶과 얽힌 실타래를 건드릴 수 없다. 이러한 이음고리를 밝히지 않고서야 성석제 님 당신 삶이 놓인 자리나 뿌리를 보듬을 수 없다.

 나로서는 사랑을 담지 않은 글과 믿음을 싣지 않은 사진을 볼 때만큼 못마땅하며 힘들 때가 없다. 글재주 있는 몇몇 분들이 써 내는 잘 팔리는 글책은 도무지 못 읽어 주겠다. 손재주 있는 몇몇 분들이 엮어 내는 꽤 이름값 높은 사진책은 참말 못 봐 주겠다. 글은 손으로 끄적인다지만, 손으로 끄적이기 앞서 마음으로 쓴다. 사진은 손으로 기계 단추를 눌러 찍는다지만, 손으로 단추를 누르기 앞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

 “기록하는 글쓰기”라고 말하는 성석제 님은 《농담하는 카메라》라는 이름을 붙인 책에서 당신이 들여다보거나 마주하거나 지내 온 삶을 ‘조곤조곤 당신 깜냥껏 말맛과 말치레를 달아’ 풀어 놓는다. 아주 나쁜 책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꽤 팔릴 만하다 싶은 책이다. 그런데 성석제 님은 ‘꽤 읽힐 만’하다는 대목하고 ‘꽤 팔릴 만’하다는 대목 사이에서 헤매고 있지 않는가 싶다.

 글쓰기를 하며 살아간다는 분으로서 ‘요지 + 의’ 말투가 지나치게 자주 나오는 대목이 껄끄럽다. “손전화기를 쓰지 말라는 요지의 안내를 했다(235쪽)”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요지의’를 보는데, 글을 이렇게 쓰면 어떡하나. 88쪽 “사설시조가 있음으로 해서”라든지, 308쪽 “차의 에어컨”이라든지, 37쪽 “지리산에 처음 간 것은”이라든지, 43쪽 “어리석음(貪瞋癡)이 없는”이라든지, 10쪽 “시간을 확인한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라든지, 20쪽 “유이무삼(有二無三)하게 인정한” 같은 글월은 곰곰이 돌아보며 스스로 가다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여 ‘막국수’라는 이름 풀이에서 ‘막’은 “마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막’은 “바로 이제”를 뜻하기도 한다. “이제 막 나온 국수”를 가리켜 ‘막국수’라고 할 수 있으며, 막국수집을 하는 분들 가운데 ‘막국수’를 아무렇게나 해서 먹는 국수가 아니라 그때그때 손님이 주문을 할 때에 바로바로 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먹도록 하는 국수라 말하며 마련하는 분이 있다. 이름 하나를 풀이할 때에 섣불리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데’ 하는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 (4343.10.1.쇠.ㅎㄲㅅㄱ)


―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글,문학동네 펴냄,2008.6.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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