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
나카야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웅진주니어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좋은 그림책 하나 알아보며 즐기려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 나카야 미와,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



 사람들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람들은 참 잘 모르기 일쑤입니다. 무언가를 지식으로 알아야 무언가를 들여다보거나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다. 언제인가 유홍준 님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고 어떤 이는 말을 뒤집어 “보는 만큼 안다”고 했는데, 아는 만큼 볼 수 없을 뿐더러 보는 만큼 알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사는 만큼 보며, 보는 만큼 살아갑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어떻게 꾸리고 있느냐에 따라 내 이웃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달라집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에 따라 내 동무하고 어깨동무하는 세기가 바뀝니다.

 참다이 살아가지 않는 내 하루라면, 나로서는 참과 거짓을 가리지 못합니다. 착하게 살아가지 않는 내 나날이라면, 나로서는 착하거나 나쁜 짓을 가누지 못합니다. 곱게 살아가지 않는 내 날들이라면, 나로서는 곱거나 궂은 매무새를 가다듬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해맑으며 싱그럽게 뛰어놀며 자라는 까닭이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아직 어른들이 입시지옥에 붙잡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괜히 입시지옥에 붙들고 싶지 않은 어른이, 어른 스스로 조금이라도 아름다이 살아가고자 용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른들이 돈에 팔려 아이하고 따순 사랑을 나누는 일을 저버린다면, 아이는 어느새 해맑음과 싱그러움을 걷어찹니다. 우리 어른들이 이름값에 목매달려 아이랑 넉넉한 믿음을 주고받는 삶을 등돌린다면, 아이는 어느 결에 기쁨과 즐거움을 담은 눈물웃음을 내팽개칩니다.

 그림책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를 읽습니다. 그림책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를 읽는 내내, 어찌하여 한국에서는 이토록 빛깔과 그림결이 고우며 어여쁜 그림책을 일구지 못하는가 싶어 슬픕니다. 그림책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를 덮고 들추다가는 또 덮고 다시 들추는 동안, 어이하여 한국땅 그림쟁이는 이와 같이 예쁜 그림을 그리지도 못하지만 예쁜 이야기를 예쁘장하게 엮는 땀방울 맛을 모르는가 싶어 쓸쓸합니다.

 참말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라는 그림책은 어여쁩니다. 더없이 곱습니다. 이야기는 살가우며 부드럽습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를 고맙게 가르치며 일깨우는 그림책이기도 한데, 그지없이 보드라이 풀어내는 줄거리로 어루만집니다.

 그림책을 또 한 번 더 들춥니다. 이 그림책 줄거리는 누구나 뻔히 알 만한 이야기로 짜여 있습니다. 이 그림책 흐름은 누구나 생각할 만하고 누구나 수다를 떨며 나누는 우리 삶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렇게 흔하고 수수한 우리 곁 이야기를 그림책 하나로 담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이 너르며 투박한 우리 둘레 이야기를 글책이나 사진책 하나로 여미지 않습니다.

 저기, 머나먼 별나라나 달나라를 찾아가야 캐내거나 일굴 수 있는 어린이문학이나 어른문학이 아닙니다. 내 손으로 호미와 쟁기를 들고 논밭을 일구며 땀을 흘리는 삶 하나에서 얼마든지 생각힘이 자라나며 창조와 슬기가 빛나는 문학이 태어납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든 사무실에서 자판을 또닥이든, 이러한 흔하며 너른 삶에서 얼마든지 예쁘고 살가운 글책·그림책·사진책 하나 영글기 마련입니다. 억지로 쥐어짜듯 그린다고 해 봤자 그림책이 되지 않습니다. 모델을 억지로 어떤어떤 모습으로 세워 놓고 사진을 찍는다고 뜻깊은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도로 여행을 하고 티벳을 오르며 산티아고를 걷는다고 놀라운 글 하나 쓸 수 있지 않아요.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는 삶을 살갗 깊이 받아들이며 우리 살붙이한테 해 주는 밥차림 이야기를 그림책 하나로 담을 만합니다. 아이하고 손수 밥해 먹는 이야기라면 그림책 한두 권이 아닌 백 권 이백 권 그려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요리책’이 아닌 ‘밥하기책’으로 재미나게 웃고 떠드는 삶을 그림책으로 알뜰히 엮을 수 있어요. 아이랑 공기놀이를 하든 숨바꼭질을 하든 까꿍놀이를 하든 쌓기놀이를 하든, 이 모든 놀이마다 따로따로 그림책 하나 묶을 수 있답니다. 사진책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랑 노는 이야기를 따로따로 하나씩 묶으면 돼요. 글책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책이란 바로 우리 삶입니다. 책이란 바로 우리 스스로 들여다보는 삶입니다. 책이란 바로 우리가 우리 이웃과 오순도순 즐겁게 나누는 삶입니다. 아는 만큼 보는 문화재가 아닙니다. 사는 만큼 껴안는 우리 터전이요 삶자락이요 살림살이입니다. 박물관에 들여놓으면 ‘여느 살림집 밥그릇’조차 문화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재를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살붙이 삶에 맞춰 쓰고’ 있으면 살림살이가 됩니다. 임금님이 쓰던 물건이라야 문화재가 되지 않습니다. 오래된 절집에서 모시고 있던 부처님 그림이나 조각이라야 문화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린 나날 쓰던 몽당연필 한 자루 또한 좋은 문화재입니다. 내가 우리 아이하고 닳고 닳도록 갖고 놀던 작은 공 하나 또한 거룩한 문화재입니다.

 그림책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를 더 헤아려 봅니다. 조금도 무섭지 않을 뿐더러 무서움을 느끼기 어려운 어린이 유령은 저와 같은 어린 사람아이랑 사귀면서 제 일을 배우고 제 놀이를 즐깁니다. 아이들이 제 어버이를 따라 빨래하는 시늉을 한다든지 차를 모는 흉내를 내며 일놀이를 받아들이듯, 깡통유령인 어린 유령은 제 엄마 유령 아빠 유령이 시키는 대로 사람누리로 내려와서 유령되기를 가다듬습니다. 깡통유령을 만난 어린 벗들은 저마다 막히거나 답답했던 일을 스스럼없이 깡통유령한테 털어놓으며 어떻게 해야 이 막힘과 답답함을 풀며 시원하고 홀가분할 수 있는가를 찾아내려 합니다.

 꼭 또래동무라야 우리 아이하고 잘 놀아 주면서 서로서로 즐겁지 않습니다. 나이로는 어른이라는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어린이마음이 되고 어린이 눈높이가 되며 어린이 삶이 되면서 어린이랑 ‘어깨동무 씨동무 미나리밭에 앉았다’ 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고 손을 맞잡으면 됩니다.

 삶을 재미나게 즐기고 삶을 보람차게 누르며 삶을 신나게 얼싸안으면 그림책 하나 시나브로 고맙게 얻습니다. 내 삶에서 얻어 내 나름대로 곰삭인 다음 내 깜냥껏 맑고 환히 펼쳐 내는 그림책입니다. 이리하여, 나카야 미와 님은 재미나고 신나며 보람찬 삶을 그림책 하나로 모두어 놓는데, 우리들 또한 우리 나름대로 재미나고 신나며 보람찬 삶을 즐기고 있다면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를 사랑스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썩 재미나지 않게 내팽개치거나 우리 삶이 아무렇게나 흐르도록 짓누르고 있다면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이든 뭐든 하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시금 되풀이합니다만, 알아야 사들여 아이랑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추천도서 목록이나 권장도서 목록이 있어야 아이한테 괜찮거나 좋을 그림책을 사 줄 수 있지 않습니다. 아이랑 그림책을 함께 읽는 마음이 되어야 하고, 아이에 앞서 어른부터 스스로 그림책을 맛깔나게 즐기는 매무새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 읽는다더라 하는 데에 휩쓸리거나,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더라 하는 데에 휘말린다면, 그림책이 아닌 플라스틱 쓰레기를 아이한테 떠넘기는 꼴입니다. 썩지 않는데다가 우리 땅을 망가뜨리는 플라스틱 쓰레기 같은 그림책이 아니라, 피와 살이 되어 일과 놀이를 신나게 즐기도록 손을 내미는 그림책 하나에 손을 뻗어 주소서. (4343.9.3.쇠.ㅎㄲㅅㄱ)


― 깡통유령, 친구가 괴롭혀! (나카야 미와 글·그림,웅진주니어,2006.2.28./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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