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번역가들
쓰지 유미 지음, 송태욱 엮음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35 ― 잇는 삶, 잇는 사람, 잇는 손
 : 쓰지 유미, 《번역과 번역가들》



- 책이름 : 번역과 번역가들
- 글쓴이ㆍ엮은이 : 쓰지 유미
- 옮긴이 : 송태욱
- 펴낸곳 : 열린책들 (2005.5.10.)
- 책값 : 12000원



 (1) 말을 다루는 책


 온누리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말을 다루지 않는 책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림만 있다거나 사진만 있는 책이라 한다면 말을 하지 않으며 말을 다루는 셈입니다. 글로만 이루어진 책이라면 이 숱한 글로 차곡차곡 말을 다루는 셈입니다.

 창작도 말이고 번역도 말입니다. 창작도 문학이고 번역도 문학입니다. 창작도 삶이며 번역도 삶입니다. 어느 자리에 서거나 어느 쪽에 있든, 우리들이 살아가는 결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어디에 있거나 어디로 가거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결 그대로 말을 합니다.

 문학이 문학답자면 문학하는 삶이 문학하는 삶다워야 하며, 문학하는 삶다움을 건사할 때에 비로소 문학하는 말이 문학하는 말다웁습니다. 문학하는 삶이 문학하는 삶다웁지 못하다면 문학하는 말이란 문학하는 말다울 수 없습니다. 이는 정치에서든 경제에서든 과학에서든 사회에서든 교육에서든 종교에서든 매한가지입니다. 내 두 다리를 어디에 세우고, 내 가슴을 어디에 놓으며, 내 눈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옳게 갈 수 있는 한편, 그릇되이 갈 수 있는 삶길입니다.

 글이란 억지로 지을 수 없습니다. 글이란 내 삶을 고스란히 풀어내어 쓸 수 있을 뿐입니다. 글짓기는 창작이 아니지만 문학 또한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 삶을 고스란히 풀어내기만 해서는 문학이 되지 않고 창작 또한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짓기’ 아닌 ‘쓰기’를 하는 밑바탕이 서야 하고, 이러한 밑바탕을 튼튼히 건사하면서 ‘아름다운 내 삶’을 일구는 손길과 땀방울을 알알이 서려 놓아야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태어나면서 다 다른 아름다움을 붙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를 다 다르게 느끼고 받아들이며 다 다른 아름다운 삶을 일굴 때에 저마다 따사롭게 빛나고 너그러이 자랍니다. 이때에, 키가 백오십 센티미터이든 백오십일 센티미터이든 백육십 센티미터이든 백팔십 센티미터이든 이백 센티미터이든 다 다르게 아름다운 몸뚱이입니다. 흔히 말하는 예쁜 얼굴이든 미운 얼굴이든 저마다 다르게 고우며 맑은 모습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좋고 저 사람은 저렇게 좋기 마련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삶이기에 반갑고 흐뭇하며 살가웁지, 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으며 똑같은 말을 하는데다가 똑같은 삶을 꾸리면 하나도 반갑지 않고 조금도 흐뭇하지 않으며 터럭만큼조차 살가웁지 않습니다.

 아주 똑같은 넓이만큼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주 똑같은 낱알을 빻고 까부르고 일고 씻고 안쳐 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밥그릇에 밥알을 똑같이 담아 똑같은 숟가락질로 퍼서 먹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다 다른 사람이고 다 다른 삶입니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이며 같을 수 없는 삶입니다. 같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같을 수 없는 말이요, 같을 수 없는 삶인데 같을 수 없는 글입니다.

 오늘날은 제도권 교육이 태어난 까닭에 보육원이나 어린이집부터 모든 목숨들을 똑같이 길들이며 가르치려 합니다.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부터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넋에 똑같은 몸짓에 똑같은 말을 하도록 짜맞춥니다.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는 분은 ‘사람은 누구나 똑똑한 머리로 태어나지만 어버이와 교사가 똑똑한 아이를 망가뜨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내 아이를 이웃 아이랑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똑같은 일거리를 찾아 똑같은 돈벌이를 하는 사람으로 키우려 하기 때문에 망가뜨립니다. 교사는 교사대로 제도권 학교에서 똑같은 교과서 지식을 똑같은 부피만큼 집어넣어 좀더 시험을 잘 치르는 훈련병으로 내몰기 때문에 망가뜨립니다.

 우리 누리를 돌아보면 나날이 새로 쏟아지는 책이 꽤 많습니다. 그렇지만 새로 쏟아지는 책 ‘권수와 가짓수’는 많으나, ‘서로 다르다’고 느낄 만한 대목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글쓴이나 그린이가 서로 사뭇 다른 삶을 일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다른 일거리를 찾으며 서로 다른 사랑과 꿈을 노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서로 똑같은 틀에 똑같은 넋에 똑같은 지식에 똑같은 가방끈에 똑같은 눈썰미에 똑같은 글매무새에 갇혀 있습니다. 홀가분한 몸뚱이가 아니요, 가벼운 마음이 아니며, 가붓한 손길이 아닙니다. 얽매인 몸뚱이요, 무거운 마음이며, 짐을 잔뜩 짊어진 손길입니다.

 다시금,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모든 책이 다루는 말은 삶에서 비롯합니다. 모든 책에 차곡차곡 실린 글월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 꾸리는 삶결이 고스란히 담긴 발자취이거나 열매입니다. 그런데, 아주 어린 나날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걷는 길이 다른 삶은 몹시 드뭅니다. 때때로 제도권 틀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더라도 제도권 울타리 안쪽에서 이리 가고 저리 옮기고 하는 모양새만 살짝 벌어지기만 합니다. 스스로 ‘내 삶 만들기’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내 길 걷기’로 뻗어나지 않습니다. 남 눈길을 살피고 남 눈치를 보며 남 삶을 기웃거립니다.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알맞으며 나를 가장 빛낼 고운 삶무늬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 나한테 가장 싱그러우며 나를 가장 알뜰히 여밀 참된 삶자락을 부둥켜안지 못합니다. 이러는 동안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한국땅에서 한국사람과 나누는 흐름이 무언긴가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한글일 테지만 속보기로는 우리 말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일본 말투이니 번역 말투이니 하는 말썽거리뿐 아닙니다. 우리 말투이냐 아니냐에 앞서 ‘내 삶을 담은 나다운 내 말투’이냐 아니냐부터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날 농사꾼들한테서는 그 집 밥을 보고 푸성귀를 보며 장맛을 보면서 ‘아무개네 밥이구나’라든지 ‘아무개가 키운 푸성귀구나’라든지 ‘아무개가 담은 장이구나’라 말하며 다 다르게 느꼈습니다. 똑같은 밥맛 나물맛 장맛이란 없습니다. 집집마다 다 다른 밥맛이요 나물맛이며 장맛입니다.

 오늘날 농사꾼들한테서는 집집마다 다른 밥맛과 나물맛과 장맛을 느끼거나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 똑같은 비료와 농약을 쓰는데 무슨 다른 쌀이요 나물이요 열매요 장이 되겠습니까. 씨제이에서 만든 콩나물과 풀무원에서 만든 콩나물과 청정원에서 만든 콩나물이 어떻게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들은 공장에서 찍어내거나 뽑아낸 먹을거리에 길들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혀와 맛과 삶과 넋 모두를 스스로 내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책은 말을 다룹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삶은 다 똑같은 제도권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며 오로지 돈만 벌고 겉치레 학벌에 매여 있을 뿐 아니라, 도시에서 시멘트 아파트와 자가용을 꼭 붙잡고 있으니, 으레 똑같은 책을 써내고 다 같이 똑같은 책을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는 이름으로 찾아서 읽습니다. 똑같이 바라보고 똑같이 생각하며 똑같이 살아가고야 맙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얼굴과 몸매와 머리가 되려고 악을 쓰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내 멋이 있어야 하는데, 더 예쁘장하다는 아무개를 닮은 머리카락 모양으로 가꾸고, 더 곱다는 아무개가 입은 옷을 사서 입으며, 더 멋지다는 아무개가 타는 자동차를 장만하여 몹니다. 내 쓸모에 따라 내 삶결을 살피며 내 보금자리를 살찌우는 길을 걷지 않습니다.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으면 글쓰기를 익히면 되지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들어간다거나 글쓰기 강좌를 들을 까닭이 없어요.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고 싶으면 사진찍기를 하면 되지 대학교 사진학과를 들어간다거나 사진찍기 강의를 들을 까닭이 없습니다. 내 삶에 따라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줄 헤아리지 못하며, 내 삶에 따라 내 몸을 사랑하고 내 마음을 아끼는 흐름을 잡아채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이 땅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말을 다루는 책’들은 하나같이 닮은 꼴입니다. 하나같이 일본 말투와 번역 말투에다가 한국말답지 않은 매무새와 얼거리이기도 하지만, 이런 말틀과 말법와 말투에 앞서 저마다 오롯이 아름다운 삶결을 알뜰살뜰 실어낸 아리따운 책으로 우뚝 서지 못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야 틀릴 수 있고, 잘못된 낱말이나 말투야 아직 잘 모르니까 어수룩하게 쓸 수 있어요. 그러나, 겉모양이 아닌 속알맹이는 야무져야 합니다. 겉모양은 좀 투박하거나 못생기더라도 속알맹이는 튼튼하고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참되고 착하며 곱게 속을 차려야 합니다. 맑고 밝으며 튼튼하게 속을 일구어야 합니다. 책 하나가 책다웁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줄거리가 알차면서 즐거웁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2) 《번역과 번역가들》 제대로 읽기


 쓰지 유미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엮은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은 프랑스 둘레에서 번역일을 하는 사람들이 번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하고,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어려움을 들려줍니다.

 ‘번역을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깊이 알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하며, ‘번역을 잘 해내려면 내 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을 잘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산문으로 옮긴 시는 진작에 시가 아니지만 산문조차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르는 나라를 처음 찾아갔을 때 이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느끼려 하는가’처럼 새로운 작품을 처음 만나며 내 동무들한테 알려주고픈 마음으로 번역을 하고, ‘밥을 먹듯이 사랑을 하듯이 마실을 하듯이’ 번역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따질 수 있는 우리 넋이라면, 창작이든 번역이든 똑같이 문화이고 예술이며 삶입니다. 지난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만 책을 읽었다면 오늘날에는 지식이나 권력하고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지식하고 권력은 처음부터 바라지 않는 사람들 또한 책을 읽습니다. 지난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스스로 책을 내놓았고,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사이에서만 책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지식과 권력 움켜쥔 사람들 스스로 책을 내놓고 나누기도 하지만, 이런 데하고 동떨어지거나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 또한 스스로 책을 내놓고 나눕니다. 둘이 섞여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지난날 사람들한테는, 아니 지난날 한국땅에서는 창작이나 번역은 문화나 예술이 되기 어려웠고 삶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는 드문드문 문화나 예술이 되는 책이 나오며, 삶이 되는 책 또한 더러더러 마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화가 되는 창작이나 번역이라면 지식이나 권력하고는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되고 삶으로 거듭나는 창작이나 번역이라 한다면 지식이나 권력을 굳이 가까이 사귈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지식이나 권력하고 동떨어진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려는 매무새이기 때문입니다.

 번역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당신들 스스로 더 깊이 알고 싶어서 번역을 한다고 했는데, 창작하는 사람들 또한 누구보다 당신들 스스로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창작을 합니다. 창작하는 사람이든 번역하는 사람이든 당신들이 다루는 이야기감 하나를 대단히 다부지게 붙잡으며 파헤칩니다. 따숩고 너른 마음결로 보듬으면서 다룹니다. 자전거 이야기 하나를 쓴다고 할 때에, 자전거를 글쓴이 삶으로 녹여내지 않는다면 자전거 이야기를 쓸 수 없습니다. 자전거를 다루는 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이도 그렇습니다. 아무렇게나 그림 하나 그려 넣고 ‘돈만 벌 생각’이라면 겉보기로는 예쁘장하거나 멋스러워 보이도록 그릴 테지요. 그렇지만 그린이 삶으로 자전거를 녹여냈다면 그리 예쁘장하거나 멋스럽지 않다지만 참 자전거다운 자전거를 그릴 뿐 아니라, 두고두고 들여다보며 질리거나 따분하지 않는 자전거를 수수하고 조촐하게 그려냅니다. 이는 번역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라, 번역하는 사람 스스로 자전거를 아끼고 사랑하며 내 몸뚱이로 녹여낼 때에라야 비로소 자전거 이야기를 알뜰살뜰 옮겨 냅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을 엮은 일본사람 쓰지 유미 님은 이 책 하나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하고 ‘번역은 어떻게 하는가’에다가 ‘번역은 어떤 일인가’와 ‘번역하는 뜻은 어디에 있나’를 차근차근 풀어내도록 숱한 사람들한테서 다 다른 삶을 다 다르게 끌어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번역을 다룬 책이 몇 가지 나오기는 했는데, 《번역과 번역가들》처럼 알뜰하고 살가우며 훌륭하게 엮지는 못했습니다. 쓰지 유미 님은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에서 ‘번역은 삶입니다’ 하는 목소리를 다 다른 번역쟁이들한테서 다 다른 목소리와 넋으로 풀어내도록 이끌었지만, 우리 나라에서 나온 번역 다룬 책들은 이 대목을 건드리지조차 못하거든요.

 살아가는 내 결에 따라 창작을 합니다. 살아가는 내 자리에 따라 번역을 합니다. 살아가는 내 터전에 따라 읽기를 합니다. 내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창작과 번역이 달라질 뿐 아니라, 나 스스로 골라서 읽는 책이 달라집니다. 내 삶이 어떻게 흐르는가에 따라 내 둘레 사람들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알아챌 수 있는 한편, 내 둘레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닫거나 도리질을 할 수 있어요. 내 삶을 보듬는 모양새에 따라 어깨동무와 손잡기가 달라집니다. 내 삶을 어루만지는 매무새에 따라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말하느냐하고 엉뚱하게 생각하고 엉뚱하게 말하느냐가 갈립니다.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은 “글과 글쟁이들”이라든지 “사진과 사진쟁이들”이라든지 “기사와 기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고쳐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번역을 다루는 줄거리를 이루고 있으나, 속내를 찬찬히 굽어살피면 ‘번역 = 삶’이라는 물줄기를 잘 붙잡고 있기에, ‘번역’ 하나를 발판 삼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슬기로운 길을 스스로 찾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즐겁고 산뜻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참말, 글은 쓰기 나름이고, 번역을 하기 나름이며, 책은 읽기 나름입니다. 삶은 일구기 나름입니다.
 



 (3) 좀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다면


 무척 좋은 이야기를 다룬 책 《번역과 번역가들》이라고 느끼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옮긴 분이 썩 좋은 말투로 옮기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번역을 다루는 책인데, 아름다운 우리 말로 옮길 수는 없었을까 싶어 안타깝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우리 말밭으로 옮겨 내기란 너무 힘들기만 한가 싶어 아쉽습니다.

 어쩌면, 이 책에 나오듯, ‘한 해에 천 쪽이나 옮겨야 먹고살 수 있다면 제대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기신 분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번역글을 좀더 알뜰살뜰 돌보거나 추스르거나 가다듬기 어렵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 책 하나를 여러 해를 두고 느긋이 옮기면서 차근차근 가다듬을 수 있었다면, 다른 수많은 세계명작 못지않게 《번역과 번역가들》이라는 책이 명작다운 작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3.7.26.달.ㅎㄲㅅㄱ)


[17, 20, 26, 101쪽] 내가 번역을 하는 것은 우선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 번역이라는 시련을 빠져나갈 때는 번역어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때는 정말로 이해했는지 어떤지가 가려진다 … 번역이란 원문 속에 간직된 것을 표현하는 일이다. 차원이 다른 의미가 중첩되어 만들어 내는 긴장감을 번역문에 옮겨 놓을 수 있을 때, 번역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내 생각에 번역한다는 것은, 일본의 독자가 일본어로 읽었을 때 그 작품이 주는 느낌에 가까운 것을 프랑스어 독자에게 줄 수 있도록 작품을 재구축하는 일이다 … 훌륭하게 쓰인 작품일수록 번역은 쉽다.

[20, 27, 38, 84, 102, 157쪽] 기원전 3세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쓰인 것 등은 지금의 중국어에서 보면 외국어 같은 것이다 … 일본어의 구어는 쉬워, 아이라면 자신의 생활환경에서 나오는 말을 쉽게 익힌다. 그러므로 구어 차원에서 보면 이중 언어 사용자는 얼마든지 있다 …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어 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다 … 하나하나의 작품은 고유한 목소리나 에너지, 숨결이나 리듬으로 독자적인 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 작품은 그대로 남지만 번역은 변한다 … 번역가에게 필요한 첫 번째 자질은 모어로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문이 서툴면 원문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가 없다.

[31, 35, 51, 109쪽] 번역에는 양쪽 언어에 대한 확실한 지식, 특히 번역문의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교양을 빼놓을 수 없다 … 번역에는 문학이나 언어의 역사에 대한 아주 깊이 있는 지식과 함께 그 작가에 대해 깊숙이 파고든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 … 왜 번역하는가 하면 아마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제도의 명칭 같은 일본사 용어를 앞에 두었을 때, 만일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지 않고 일본어 그대로 썼다면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정말로 잘 생각했는지 어떤지, 아마 나 자신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일본의 역사에 대해 쓰는 것은, 물론 일본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된 책이기 때문이다 …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77, 83, 123쪽] 번역할 작품을 차분히 읽어 친숙해지고 거기에서 일종의 일관성을 찾아내면 ‘자연스러운’ 번역문이라는 환상에 빠질 위험은 적어진다. 주문을 받아 번역하는 경우에 자주 있는 일인데, 번역할 페이지만 읽으면 함정에 빠져 의미라든가 중요한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감수성 같은 것만을 번역하기 십상이다 … 번역에는 여러 가지 함정이 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출판사 측에 의해 생긴다. 잘 팔리기 위해서는 이른바 독자의 문학적 기호에 맞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출판사는 번역 원고에 손을 대 아주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번역 냄새를 지우기 위해 다시 쓰는 경우도 있다 … 네덜란드의 네덜란드어는 영어의 영향으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그에 비해 벨기에의 네덜란드어는 과거의 것을 훨씬 잘 보존하고 있어, 19세기 말이나 중세에서 유래하는 표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모르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벨기에 사람이 적어진다는 것은 네덜란드어의 풍부함이 상실되어 버리는 일이다.

[91, 101, 122쪽] 번역의 재미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여 다른 문화와 접하는 것 같은 일이다. 문화 탐색이라는 것은 정말 지평선을 넓혀 준다. 끝이 없는 일이다 … 문제는 훌륭한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번역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쪽 언어를 깊이 알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쓰는 것도 알아야 한다. 쓰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번역문의 표현력을 길어 낼 원천이 없다 … 단어의 의미라면 사전에 쓰여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각각의 저작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어조와 리듬, 물론 거기에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114, 130, 198쪽] 에로와 범죄를 다룬 것은 새롭고 잘 팔리기 때문에 많은 출판사들이 그런 책을 출판하여 이익을 올리고 있다. 번역한 것도 잘 팔리는 것은 속악하고 장정의 예술성도 형편없는 책이다 … 나에게 중요한 것은 책이 번역되어 독자의 손에 건네지는 일이다 … 1년에 1천 페이지나 되는 번역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면 질 높은 번역을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128, 155쪽] 번역하는 데는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번역하는 언어의 나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될수록 오랫동안. 그것은 이미 언어학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그 나라 사람들과 섞여 버스나 전철을 타고, 그 나라 여자 또는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 하나의 언어란 그러한 것 전부를 말한다. 번역하려는 문화, 문명, 생활은 그러한 것 전체이다. 그것은 음식이고 여행이며 연애이다 … 어떤 언어로 쓰인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재창조하는 일이다.

[175쪽] 번역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그 번역을 읽은 사람들은 잘못된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톨스토이나 체호프를 대작가로 인정했다.

[204, 206쪽] 나의 번역학교가 성공한 것은 그것이 대학의 틀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 번역은 예술과 같다. 출판 번역만으로 생활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묻는 것은 피아노 연주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사는 것이라면 가능해도 피아노 연주로 먹고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 때로 학생들은 훌륭한 번역어를 찾아낸다. 나보다 훨씬 좋은 경우도 있다. 멍청하게 있을 수는 없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면, 자칫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번역에 쉽게 만족해 버리기 십상이다.

[235쪽] 최근 교양 있는 사람이나 문화ㆍ사회ㆍ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를 산다. 문학적 에세이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의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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