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글쓰기 - 내 마음을 살리는 말 한 마디
최종규 지음 / 호미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쓴 책을 나 스스로 말하기. 내 이름을 박아서 내놓은 책이지만, 이 책에 담은 알맹이와 땀방울은 나한테 고마운 분들 넋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내가 쓴 책을 내가 이야기한다기보다는, 내 둘레 아름다운 사람들 삶과 넋이 책 하나로 어떻게 갈무리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글을 적바림한다고 하겠다. 야옹야옹~) 


 이 책 하나 146 ― 내 마음을 살리는 말 한 마디
 : 최종규, 《생각하는 글쓰기》


- 책이름 : 생각하는 글쓰기
- 글 : 최종규
- 펴낸곳 : 호미 (2009.11.30.)
- 책값 : 1만 원


 (1) 나는 왜 책을 쓰는가


 글 한 줄을 적바림하면서 우리 누리를 바로세우거나 알차게 가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 한 줄을 적바림할 때에는 오늘 하루 제가 꾸리는 삶을 옮길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둘레 사람들이 우리 누리를 올바르고 어여쁘게 일구어 나가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땀흘리고 애쓰는 분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돈값 이름값 힘값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는, 또 이렇게 하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저 제 둘레 사람들이 모두 올곧게 애쓰든 몇 사람만 올바르게 힘쓰든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운 길을 저버리든, 저는 저대로 저한테 가장 알맞으면서 올바른 길을 찾고 꿋꿋하게 걸어갈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적바림하는 글쪼가리 하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저 스스로 제 삶을 얼마나 제 마음에 흐뭇하도록 일구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이야기 한 자락일 뿐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쓴 글 한 줄이 많은 사람한테 읽힐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쓴 글 한 줄을 많은 사람한테 읽혀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아 주면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안 읽어 준다 하여도 저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제 글을 꾸준히 되읽으면서 어제와 오늘과 이듬날이 한결같이 곧고 고우며 맑을 수 있도록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남을 일깨우는 글이 될 수 있습니다만, 남을 일깨우기 앞서 저 스스로를 일깨우는 글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책을 수없이 찾아 읽든,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스승을 수없이 찾아가서 말씀을 여쭈든, 저를 가르쳐 주는 고마운 일거리를 찾아 바지런히 땀흘리며 일하든,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하고 어울리더라도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글 한 꼭지에 차곡차곡 담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담는 글이고, 저 스스로 깨달은 이야기를 저 스스로 잊지 않고 되새기고자 읽는 글이라고 느낍니다.

 날마다 차근차근 새로워지는 삶이 되도록 날마다 글 한 꼭지이든 두 꼭지이든 갈무리하면서 날마다 제 삶을 가다듬는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좋은 생각을 맺으면서 하루하루 조금씩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어 주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 꾸준하게 새로워지고 고우며 맑게 거듭날 수 있으면 저는 제 삶을 곱고 맑게 꾸리는 셈입니다. 제가 제 삶을 곱고 맑게 꾸릴 수 있다면, 제가 터잡고 있는 마을에서 곱고 맑은 넋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제가 터잡고 있는 마을에서 곱고 맑은 넋을 나눌 수 있으면, 제 둘레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곱고 맑은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고, 제 삶자락과 삶터부터 좋은 이야기가 어우러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혁명이나 개혁을 이룰 수 있기도 할 터이나, 저한테는 열 해나 스무 해나 쉰 해나 예순 해에 걸쳐 아주 더디게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제 삶부터 혁명이나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땀을 흘리고 싶습니다. 제 글쓰기란 갑작스레 크게 뜨거나 널리 읽히는 글을 낳는 일이 아니라, 짧으면 열 해이고 으레 서른 해이며 길면 예순 해 남짓에 걸쳐 좋은 뜻 하나를 이루고 싶은 긴 걸음걸이입니다.

 지난 2004년에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처음으로 내놓은 다음 2006년에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내놓았습니다. 올여름부터는 세 번째 헌책방 이야기를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너 해 또는 대여섯 해가 지난 다음에는 네 번째 헌책방 이야기를 쓰고자 새 마음을 가다듬고 싶습니다.

 지난 2009년 봄에 《자전거와 함께 살기》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을 내기 앞서인 2008년 여름에 딸아이를 낳아 기르는 터라 두 번째 자전거 이야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워야 할 뿐 아니라, 아이와 다닐 때에는 자전거를 탈 수 없는 탓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자전거수레에 아이를 태울 수 있다면, 또 아이 스스로 자전거를 탈 무렵이 되면 시나브로 두 번째 자전거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겠지요.

 지난 2009년 가을에 《책 홀림길에서》를 내놓았습니다. 이 책에 실은 글은 다른 어디에 한 번도 내놓지 않은 글을 묶었는데, 앞으로 우리 살림집을 느긋한 곳으로 옮긴 다음에 두 번째 책 이야기 책을 새롭게 내놓고픈 꿈을 꿉니다. 서른다섯 나이에 돌아본 책 이야기가 있으면 마흔이나 마흔다섯에 돌아보는 책 이야기가 있고, 쉰이나 예순이나 일흔에 돌아보는 책 이야기가 있어요. 저마다 깊이와 너비가 다릅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겨울 들머리에 《생각하는 글쓰기》를 내놓았습니다. 제가 가장 깊이 마음을 쏟으며 하는 일이 ‘우리 말 이야기’ 쓰기임을 헤아린다면, 제가 내놓은 책 가운데 가장 늦게 나온 책입니다. 책이 나온 이제야 밝히면, 이 책은 2005년에 진작에 내기로 했으나 다섯 해를 미루고 늦춘 끝에 겨우 나왔습니다. 아마 2005년에 번쩍 하고 내놓았으면 좀더 많이 읽히거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2005년이 아닌 2009년 겨울에 내놓았기에 글을 더 손질하고 매만질 수 있었고, 다섯 해 사이에 새롭게 배우거나 뒤늦게 깨달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앞으로 두 번째 ‘우리 말 이야기’를 내놓을 때에는 그동안 새로 깨닫거나 배우는 이야기에 따라 제 어설프고 어리석은 생각밭을 다시금 가누어서 내놓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책 하나를 내놓을 때마다 저로서는 지나온 삶을 갈무리하는 한편, 제가 걷는 오늘을 곰곰이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좀더 슬기롭게 다스리는 눈길을 닦는다고 하겠습니다. 








 (2) 나는 왜 책을 선물하는가


 지난 《모든 책은 헌책이다》부터 《생각하는 글쓰기》까지 다섯 가지 낱권책을 내놓았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개인잡지는 여덟 권을 내놓았습니다. 모두 열세 권이며, 책방에 넣지 않은 비매품 책으로 《사진은 삶이다》와 《말은 삶이다》를 내놓은 적 있습니다. 이리하여 서른여섯 나이에 모두 열다섯 권이 되는 책을 쓴 셈인데, 열다섯 권에 이르는 책을 내놓는 동안 출판사에서 받은 글삯은 한 푼도 없습니다. 때로는 출판사에 책 찍을 돈을 보태어 주었습니다. 이러면서 우리 누리에 내놓은 책 열다섯 가지를 줄잡아 200권 남짓 둘레에 선물했습니다. 맨 먼저 헌책방 일꾼한테 선물했고, 저한테 고마운 분들한테 하나하나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제 책을 3000권 넘게 선물해 온 셈입니다.

 지난날에는 책 만드는 일을 하며 일삯을 벌었으니 제 책을 제 돈으로 만들어 둘레에 선물하고 나면 빈털털이가 됩니다. 그런데 빈털털이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글을 잇달아 쓸 수 있고 새삼스러운 책을 꾸준히 내놓을 수 있습니다. 아쉬움을 남기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어 쓰는 글이기에 다른 곳에서 돈벌이를 하여 푼푼이 모은 돈 얼마를 책한테 송두리째 바쳐 이 책들을 둘레에 선물할 때 그지없이 보람있다고 느낍니다.


.. 지식으로 다루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보여주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쌓자는 ‘우리 말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식을 참다이 사랑하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지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깨닫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지식이란 다름아닌 내 삶임을 옳게 느껴 넉넉하게 껴안자는 ‘우리 말 이야기’입니다 ..  (머리말)


 누구는 자가용을 몰고 누구는 아파트를 장만하며 누구는 맛난 밥 좋은 옷을 입는 데에서 보람을 느끼겠으나, 저로서는 자가용 안 몰고 아파트 장만 안 하며 맛난 밥 안 먹고 좋은 옷 안 입는 자리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데에 들어갈 돈을 옹글게 그러모아서 책 하나를 여미는 일만큼 저한테 기쁜 일은 다시 없으니까요. 제가 고운 목숨 하나 선물받아 이 땅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으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란 글 하나 쓰고 책 하나 묶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올봄 5월이 되면 지난 몇 해 동안 조용히 일구어 놓고 있던 글을 여미어 두 가지 책을 함께 내놓습니다. 하나는 사진을 이야기하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은 책입니다. 낱권책으로 치니 여섯째 책과 일곱째 책이 됩니다. 이 책들이 어여쁘게 태어나면 이 책들도 ‘글삯에 맞먹는’ 만큼 책으로 받아서 둘레에 하나둘 선물하고 다니겠지요. 인천골목길을 담은 사진책은 따로 더 장만해서 좋은 사진이 태어나도록 도와준 골목이웃을 찾아다니며 한 권씩 선물하고 다닐 테고요.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힘들어 책을 읽을 겨를을 못 낸다고 하는데, 책을 읽을 겨를을 못 낼 뿐 아니라, 바쁘고 힘든 가운데 즐겁고 손쉽고 재미나게 읽을 책이 없기도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제 글이 썩 재미나거나 신나는 글은 못 된다고 느끼지만, 바쁘고 힘든 가운데 손쉽게 읽으며 생각 한 줌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책이 되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새로운 책을 내놓을 때마다 생각하는데, 이번 책은 지난 책과 견주어 좀더 손쉬우며 살가울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사람이 되고자 꿈꾸고, 차츰차츰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자고 비손합니다. 이 마음을 책 하나에 살며시 담아 이웃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입으로는 잘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을 책 하나로 쑥스러이 나누고 싶습니다.
 







 (3) 내가 쓴 글을 내가 눈물겹게 읽기


 제가 쓴 글은 제 이름을 걸고 나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롯이 제 글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둘레 곱고 맑은 사람들 넋을 고맙게 물려받고 선물받으면서 쓸 수 있는 글인 까닭입니다. 제가 잘나서 쓰는 글이 아니라 제 둘레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쓰는 글입니다. 제 둘레 좋은 사람들이 좋은 말과 삶을 보여주고 베푼 까닭에 이 말과 삶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낸다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제가 쓴 글을 즐겨읽습니다. 거듭 읽고 새겨서 읽습니다. 제 이웃들이 저한테 어떤 사랑을 나누어 주었는가를 제 글을 읽으면서 되돌아보고, 제 이웃들이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얼마나 온몸 바쳐 일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싶어 제 글을 곰삭입니다. 제가 읽는 제 글이지만, 제 글을 읽으며 더없이 기쁘고 즐겁고 반가우며 고맙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읽는 글이요 웃음을 터뜨리며 읽는 글입니다. (4343.4.3.흙.ㅎㄲㅅㄱ)


[19쪽]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을 때 삶터가 삶터다웁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나라가 엉망이어도 조그마한 마을 하나는 홀로 튼튼히 우뚝 설 수 있을 테지만, 이제는 작은 마을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가 벌이는 숱한 막개발에 쫓기고 밀리고 무너집니다. 큰뜻에 따라 작은뜻은 묻어야 한다면서 용역 철거꾼과 경찰이 한몸이 되어 밀어냅니다. 이러는 동안 우리 삶다움을 지킬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습니다. 우리다운 생각을 품을 수 없고, 우리다움을 추스를 일과 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자리라면, 우리가 하는 일과 쓰는 글이 말답고 글답기 어렵습니다. 뒤틀리고 맙니다.

[30쪽] 무엇보다도 ‘기피 옥수수’라는 이름에서는 혀를 내두릅니다. 낱말책에도 없는 한자말 ‘기피’인데, 이런 이름을 어디에서 찾아내거나 알아내어 쓰는지 더없이 궁금합니다. 모양새 그대로 “껍질 벗긴 옥수수”라 하면 될 텐데, 왜 ‘기피 옥수수’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써야 할까요. 글자수가 둘 늘어서 “두 글자짜리 짧은” 이름을 쓰려는 마음이었을까요. 길이는 짧더라도 알아듣기에 좋지 않으면, 짧으나 마나임을 몰라서일까요. 농협에서 이와 같은 한자 이름을 즐겨쓰기 때문인가요. 농사짓는 분들 모두 이러한 이름만으로 곡식을 가리키기 때문인가요.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며 깨는 ‘깨’입니다. 이런 곡식한테 얼토당토않을 뿐 아니라, 우리 삶하고 아주 동떨어진 이름을 붙이는 일은 농사짓는 분들한테나, 생협 운동 하는 분들한테나, 또 우리한테나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우리 땅을 살리는 농사와 생협뿐 아니라, 우리 말과 글을 함께 살리는 농사와 생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34∼35쪽] 밥상에 차린다고 아무 먹을거리나 집어먹을 수 없습니다. 먹고살기 팍팍하다고 군인이 되어 싸움터에 나가 사람 죽이는 짓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또는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환경을 더럽히는 공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없습니다. 밥 한 그릇을 먹어도 제대로 몸과 마음에 피와 살이 되는 밥을 먹을 노릇입니다. 돈 한 푼을 벌어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질 돈을 벌 노릇입니다. 말 한 마디를 쓰더라도 우리 넋과 마음과 삶을 일으키거나 사랑스레 보듬을 만한 말을 할 노릇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 마음과 생각과 넋이, 삶과 일과 놀이가, 그리고 말과 글과 이야기가 따로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38∼39쪽]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으며, 세상이 세상다울 수 없는 이 땅에서는 책이 책다울 수 없는데다가 말이 말답지 못합니다. 우리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거나 나눌 자유가 없이 국가보안법에 짓눌리고, 우리 마음을 스스럼없이 펼치거나 함께할 권리가 없이 통신검열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자리에 학문이 학문답게 뿌리를 내립니다. 세상이 세상다울 수 있는 터전에 말이 말답게 줄기를 뻗습니다. 얼과 넋이 얼과 넋다이 아름다울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 일과 놀이는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이 가득한 일과 놀이로 새로워지거나 새삼스러워집니다.

[45. 46쪽] 길을 가니 길손이요, 함께 길을 가서 길동무이며, 길에서 먹으니 길밥이고, 길을 그려 놓으니 길그림입니다. 길에서 살듯 일을 하거나 길을 좋아하니 길사람이고, 어디로 나아갈까 헤아리면서 길머리를 찾고, 반가운 이를 맞이하고자 길마중을 나갑니다 …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빈다”고 흔히 말합니다. “죽은 이가 저승에서도 잘살기를 빈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예부터 써 왔으니 오늘날에도 쓴다고 할 테고, 앞으로도 꾸준히 써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문이 아닌 한글을 쓰는 우리요, 우리 나름대로 우리 말투를 하나둘 꾸려 나갈 때가 한결 낫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돌아가신 이를 기립니다”라든지 “떠나가신 넋이 걱정없이 잠드시기를 빕니다”라든지 “고이 잠드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50, 69쪽] 예전에는 저도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그래서 참 좋구나 싶은 말을 보든, 참 얄궂구나 싶은 글을 읽든, 그러려니 하고 흘려보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저뿐 아니라 누구나 우리 말과 글을 놓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니, 좋은 말이 좋은 말인 줄 느끼지 못하고, 얄궂은 글이 얄궂은 줄 느끼지 못하지 싶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좋은 버릇은 들이지 못하고, 얄궂은 물이 자꾸 들면서, 당신 스스로도 안타깝고, 우리 나라나 문화로 보아도 안쓰러운 쪽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 누구나 조금씩 생각을 기울여 보면 얼마든지 한결 걸맞고 알맞고 살갑게 낱말 하나 엮어 낼 수 있습니다. 말투나 말씨도 더욱 부드럽고 아름다이 여밀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니 좀더 낫다고 여길 만한 낱말이나 말투나 말씨를 못 찾고 못 느끼고 못 쓰고 있을 뿐입니다.

[57, 59쪽] 한자말을 쓰는 일이 잘못은 아닙니다. 어느 말을 쓰든 올바르게 쓰지 못하는 일이 잘못입니다. 알맞게 써야 할 자리에 알맞지 못하게 쓰니 잘못입니다 … 퍽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가난뱅이’는 토박이말로 있는데, ‘부자富者’는 왜 한자말로 있을까 하고. 돈이 없거나 적은 살림을 가리키는 말은 토박이말로 ‘가난’이면서,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을 가리키는 말은 왜 한자말로 ‘부유富裕’일까 하고. 머리통이 굵어지고 여러 낱말책을 찾아보던 어느 날, 우리 토박이말로도 돈이 많거나 넉넉한 살림을 가리키는 낱말이 있음을 뒤늦게 배웁니다. 토박이말로는 ‘가멸다’입니다. 돈이 아주 많은 살림을 ‘가멸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느 ‘부자’라면 ‘가면이’이고, ‘억만장자’라면 ‘가멸찬이’입니다.

[63쪽] 말을 살리는 일은 제 삶을 살리고 제 넋과 얼 또한 살리는 일입니다. 말 한 마디를 살리면서 우리 삶 한 자리를 차근차근 살립니다. 우리 삶 한 자리를 차근차근 살리는 가운데 우리 넋과 얼이 새로워집니다. 아름답게 빛나든 그리 밝지 않게 빛나든 나날이 싱그러움을 더해 갑니다. 작은 한 가지를 들여다보는 마음이기에, 내 둘레에서 내 자그마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좀더 찬찬히 둘러봅니다. 천리길을 왜 한 걸음부터 걸어야 하는지, 티끌을 모으면 왜 큰산이 되는지, 첫 술에 어이하여 배부를 수 없는지,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깨달으며 가슴으로 새깁니다.

[64, 66쪽] 말을 살리지 못하면 내 삶을 살리기 어렵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 지식인 손과 입을 거쳐서 들어온 말투가 사그라들기는커녕 되살아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기만 할 뿐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영어 말투가 또다른 뿌리를 내리면서 속속들이 퍼집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한테 고유한 말과 글을 가꾸면서 보듬기란 참 어렵습니다. 말과 글에 앞서 삶이 뿌리뽑히고 문화가 내동댕이쳐지며 넋과 얼이 짓밟힙니다. 말만 살릴 수 없고 글만 북돋울 수 없기에, 삶을 함께 살리고 문화를 같이 북돋우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87, 90쪽] 말이란, 말하는 사람 스스로 가꿔야 합니다. 글이란, 글 쓰는 사람 스스로 가꿔야 합니다. 얼도 넋도 맟나가지이며, 생각과 슬기도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가꿀 때 비로소 싱그러운 새싹을 돋우어 내고 줄기를 올립니다. 우리 말을 가꾸고자 우리 머리를 쓸 때 바야흐로 튼튼한 가지가 뻗어나고, 가지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자꾸 바깥에 눈을 돌리며 바깥에서 거저 얻으려 한다면, 꿍꿍이속을 키우는 바깥에 있는 빚쟁이들이 어느 한때 갑자기 들이닥치며 우리 말살림을 죄 거덜나게 하리라 봅니다 … 같은 서울에서도 서로를 돈과 힘과 이름으로 나누는 짓을 그만두지 않고서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서울 안과 서울 밖을 나누는 못남을 떨쳐내지 않고서야, 사람과 뭇목숨 모두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고서야, 입으로만이 아닌 몸으로 콩 한 알도 나누는 매무새로 살아가지 않고서야, 옹글게 쓰는 우리 말이란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봅니다.

[103, 132쪽] 좋은 사람들한테 마음을 쓰듯, 우리가 날마다 쓰는 우리 말에도 마음 한 번 써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좀더 살가운 마음을 담을 수 있도록, 좀더 쉽고 깨끗하게 쓸 수 있도록, 좀더 알맞고 넉넉하게 쓸 수 있도록, 좀더 우리 삶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우리 생각도 알뜰히 담아낼 수 있도록 마음을 쓰면 좋겠습니다 … 바라는 대로 살게 되고, 살아가는 대로 말이 됩니다. 꾸미는 대로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대로 글이 바뀝니다. 우리가 옳게 살고자 애쓰면 옳은 말을 저절로 쓰게 되고, 우리가 그릇되게 사는 틀을 깨지 않으면 우리 글은 그릇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