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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ㅣ 소년한길 유년동화 6
도이 카야 글 그림, 김정화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좋은 그림책에는 참사랑을 담습니다
[그림책이 좋다 76] 도이 카야,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책이름 :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글ㆍ그림 : 도이 카야
- 옮긴이 : 김정화
- 펴낸곳 : 소년한길 (2002.6.10.)
- 책값 : 6500원
(1)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
온누리에 나오는 모든 책이 모두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면서 만든 책이 있다고 느끼고, 나날이 돈을 바라보는 책이 차츰 늘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돈바라기 책이라 하더라도 책은 책입니다. 다만 책다운 책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엠에스지를 넣었느냐 안 넣었느냐를 놓고 아웅다웅이지만, 이에 앞서 유전자를 건드린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을 얼마나 먹고 자란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깃들었느냐를 돌아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손쉽게 사다 먹는 밥거리 가운데 밥거리다운 밥거리란 없다고 할 만하다는 흐름하고 맞닿습니다.
아주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가 있습니다. 며칠 앞서 우리 세 식구가 서울에서 인천까지 자동차를 얻어타고 돌아온 적 있습니다. 생태와 진보를 바라는 분들 자그마한 모임자리에서 우리 옆지기가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해서 찾아갔다가 전철이 끊길 무렵이 된 탓에, 인천(부개동)에서 자동차를 몰고 온 분이 우리 식구를 집 언저리까지 자동차로 태워 주었습니다.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세 식구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찻길에서 배탈이 났습니다. 전철을 탈 때에는 사람들한테 찡기고 낑기며 힘들기는 하여도 속이 메슥거리지 않는데,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숨조차 쉬기 어려워 어지러웠습니다. 아이는 집에 닿고 보니 차에서 똥을 싸서 기저귀를 적셨고, 옆지기는 이튿날까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지냈습니다. 저라고 몸이 나을 구석이 없으나, 집살림을 하느니 바깥일을 하느니 하면서 아픈 몸을 겨우 붙들어 세웠습니다.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마다 고맙다는 마음이지만, 고마운 한편 제발 10분 넘게 달리지 않는 얻어타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쩐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면 몸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날 사람들치고 자동차를 타며 멀미를 하거나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어지러울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부터 고속버스를 타지 못했고, 이제는 고속버스를 타지만 한 번 타고 나면 며칠 몸앓이를 할 뿐더러, 택시이든 고급자가용이든 작은자가용이든 자동차라는 탈거리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꽤 많은 짐을 한꺼번에 멀리까지 제법 빨리 옮겨 주는 자동차라 하지만, 제 몸과 삶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제 몸에 잘 안 맞기 때문에 되도록 바깥에서는 밥을 사먹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몸에 거의 안 맞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어타기조차 싫고 자가용을 장만하기는 죽기보다 싫고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빨래기계를 쓰면 손일을 덜고 다른 일을 할 겨를을 넉넉히 낸다고 합니다만, 저로서는 손빨래를 하는 기쁨과 보람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더러 손빨래를 하는 동안 옷을 한결 아끼면서 나중에 ‘빨래기계가 낡아서 버려야 할 때에 쓰레기를 만드는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빨래기계를 쓰면 전기와 물을 얼마나 많이 잡아먹는데요. 전기를 아예 안 쓰고 물은 훨씬 적게 쓰면서 우리 식구 옷가지를 좀더 사랑하고 아끼는 손빨래는 제가 두 눈을 감고 죽는 날까지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이런 삶이 고스란히 제 책읽기로 이어집니다. 손을 쓰고 몸을 놀리며 땅하고 가까이 맞닿고픈 삶이 제가 좋아하는 책을 찾는 눈길로 옮아갑니다. 몸이 제아무리 도시에 깃들어 있다 할지라도 땅을 사랑하는 넋이 스민 책이 좋습니다. 산골마을에서 일을 할 때에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을 사랑하는 얼이 깃든 책이 좋았고, 골목동네 자그마한 가난뱅이 집에 살면서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에다가 꽃과 나무와 풀을 사랑하고 아끼는 책이 반갑습니다.
아이를 옆지기와 함께 키우면서 옆지기나 저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책’을 따로 읽을 틈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든 보육원에든 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보기 때문에 하루 내내 아이하고 붙어 지내야 하니까요. 우리는 돈을 내고 아이를 또래 동무하고 억지로 사귀도록 내몰지 못합니다. 돈이 없는 탓도 있다지만, 돈이 있었다고 해도 아이를 굳이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안 넣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키우기란 얼마나 즐겁고 신나고 아름답고 멋진데요. 다만, 참말 힘들고 고되고 괴롭고 벅찹니다. 즐거우면서 힘들고, 신나면서 고되며, 아름다우며 괴롭고, 멋지며 벅찹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옆지기는 퍽 자주 “아주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따로 말로 나타낼 줄을 모르지만 “아이가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아빠가 좋아한다는 책이라 하지만, 정작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 아이 바로 너를 돌보면 다 알 수 있는 지식과 생각이 담긴 책이니, 굳이 이런저런 책을 읽기보다 바로 너하고 어울리면 아빠가 몸으로 깨우치고 받아들이고 곰삭일 수 있음’을 배우곤 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팔이 빠지거나 허리가 쑤시는 가운데, 날마다 치워도 끝이 없을 뿐더러 나날이 아이 옷가지 빨래가 넘쳐나는 이 모든 고단함이 곧바로 아이키우기에서 얻는 보람이 됩니다.
예전에 혼자 살 때에도 아이들 그림책을 참으로 신나게 사들이며 혼자서 즐겁게 보았고, 오늘날 세 식구 살아가며 아이들 그림책을 그지없이 반가이 장만하며 세 식구 나란히 봅니다. 지난날에 아이들 그림책을 신나게 사들이던 때에는 아이들 그림책이란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부터 보고 어른들이 ‘꼭’ 함께 보면서 ‘아이보다 더 깊고 넓게’ 배우고 익히고 사랑할 책이라고 느꼈고, 오늘날 세 식구 복닥이며 아이들 그림책을 펼칠 때에는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책과 아이가 쳐다보지 않는 책이 갈리는구나. 왜 갈릴까?’ 하고 돌아보면서, 아이가 콧방귀조차 잘 안 뀌는 책에는 아이가 이렇게 고개를 돌릴 만한 까닭이 있음을 차츰차츰 깨닫습니다. 그림만 이쁘장하다고 아이가 좋아하지 않으며, 그림이 엉성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림 하나하나에 너른 사랑이 담겼을 때에는 아이는 어김없이 알아챕니다. 그림이 알록달록하더라도 아이가 달가이 받아들이지만 않으며, 그림이 수수하다 할지라도 그림마다 깊은 마음이 스몄을 때에는 아이는 아주 좋아하고 자주 펼쳐 봅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나중에는 앙증맞은 손으로 그림책을 끄집어 내서 아빠나 엄마 앞에 집어던졌고, 조금 더 큰 뒤에는 아빠나 엄마 무릎에 그림책을 들고 털썩 주저앉아 얼른 펼쳐 달라고 옹알거리고, 이제는 혼자 책을 펼쳐서 한참 들여다보곤 하며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되풀이 넘기곤 합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며 아이한테 참으로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그동안 제가 장만한 그림책들은 거의 다 우리 아이 또한 퍽 좋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소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다른 아이를 바라볼 때’보다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눈길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몸소 아이를 낳아 길렀기 때문이라기보다 하루 내내 벌써 스무 달째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아니, 스무 달째 아이와 하루 내내 붙어 지냈다기보다 스무 달째 아이하고 얽힌 모든 일을 엄마랑 아빠랑 모두 손으로 보듬고 몸으로 부대끼면서 마음으로 사귀어 온 나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어린이책을 어린이만 보도록 하는 책이 아니라 엄마 아빠 된 사람을 비롯하여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뿐 아니라 모든 어른이 함께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날 이원수 님과 이오덕 님부터 줄곧 외친 까닭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이란 책 하나로 어린이와 어른을 잇는 좋은 다리이거든요. 아름다운 고리이거든요. 멋진 놀잇감이거든요. 훌륭한 배움터이거든요. 넉넉한 보금자리이거든요. 재미난 이야기보따리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손길이거든요.
어른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이책을 돈바라기 눈길과 몸짓으로 만드는 어른들을 마주할 때에는 몹시 싫습니다. 몹시 딱합니다. 몹시 슬픕니다. 어린이책이란 돈이 아닌 사랑으로 빚을 책이고, 어린이책부터 사랑으로 빚는 매무새를 갈고닦아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크면서 어른이 되어 어른책을 빚을 때에도 돈바라기 어른책이 아닌 사랑바라기 어른책을 일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림과 뜻만 좋은 어린이책을 넘어
그림책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는 어린 오누이가 목도리를 놓고 다툼질을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오누이한테 뜨개 목도리를 선물해 준 할머니가 슬기로운 생각을 짜내어 서로를 더욱 애틋하게 묶어 준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고운 그림결에 따라 재미나고 살가운 이야기를 펼치는 좋은 어린이책입니다. 노란빛 목도리는 노란빛대로 어여쁘고 빨간빛 목도리는 빨간빛대로 어여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코앞에 마주하는 좀더 나아 보이는 빛깔에 끌리면서 시샘을 하기도 하고, 이런 시샘을 다스리며 한결 사랑스러운 길로 나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를 차근차근 풀어 보입니다.
.. 치프와 초코는 강아지 오누이입니다. 오늘 할머니께서 선물을 보내 주셨어요. 오빠 치프에게는 노란 목도리를, 여동생 초코에게는 빨간 목도리를 보내셨습니다. 치프는 노란 목도리를 보고 좋아하며 말했어요. “이 목도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걀말이 색깔이야. 치프는 목도리를 목에 둘렀습니다. 초코는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가 더 멋져 보였어요. “나도 달걀말이 색깔 목도리가 좋아. 바꿔 줘, 바꿔 줘.” 엄마가 말했어요. “어머, 초코의 목도리는 빨갛고 귀여운 딸기 색인걸.” .. (2∼4쪽)
그림책이 되든 어린이책이 되든 어른문학책이 되든 마찬가지인데, 기나긴 말을 줄줄줄 늘어뜨리면서 이런 까닭 저런 까닭을 들 수 없습니다. 짤막한 한두 줄로 느낌과 생각과 삶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에서도 할머니가 뜨개 목도리를 선물한 이야기를 짤막히 보여주고, 동생이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를 더 좋아하지만, 엄마가 잘 달래 주는 모습을 단출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첫 대목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이들한테나 엄마한테나(또 이 그림책에는 나오지 않는 아빠한테나) 큰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습니다. 할머니가 오누이한테 선물한 목도리는 할머니가 한 땀 두 땀 애써 뜨개질을 해서 일군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 몇 푼으로 치른 목도리가 아니라,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넋으로 애틋하게 뜬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해요. 엄마도 아이도 “할머니 고맙습니다.”라든지 “우와, 이 목도리를 손으로 떴다구요?”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비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첫 대목에서 이런 대목이 비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두 오누이가 노란빛과 빨간빛을 보고 다툼질을 하겠다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시샘하며 다툼질을 하더라도 ‘할머니 사랑 손길’을 돌아보는 매무새를 한 줄쯤 살며시 밝힐 수 있었다면, 이 그림책은 더없이 따스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책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초코는 다시 노란색 목도리가 갖고 싶어졌어요. “바꿔 줘, 바꿔 줘.” “싫어. 나도 노란색이 좋단 말이야.” 초코가 울기 시작했어요. 치프는 하는 수 없이 목도리를 바꿔 주었어요.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 (10∼11쪽)
아이들은 둘이 저마다 받은 목도리에 얼마나 깊고 짙고 너른 사랑이 담겼는지를 먼저 찬찬히 살피면서 돌아볼 겨를이 없이 ‘할머니 댁에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려’ 했기 때문에, 할머니 댁으로 찾아가면서도 끝없이 다툼질을 합니다. 더 좋아 보이는, 또는 더 좋은 물건을 오빠한테 주거나 동생한테 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오누이가 아니라,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으니까 ‘내가 가져야겠어!’ 하는 마음만 부글거립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라지만, 왜 오누이이든 형제이든 자매이든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되기 어려울까요. 아이들이 이런 마음을 타고났기 때문인가요. 우리 어른이 잘못 가르친 탓인가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른들 스스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은 것’을 스스럼없이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없는 탓인가요.
.. 할머니네 집이 바로 눈앞이에요. 꽃밭에는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습니다. 정말 예뻤습니다. 하지만 노란 꽃밭을 보니 치프는 걱정스러웠어요 .. (16∼17쪽)
오누이는 할머니 댁에 와서도 “할머니, 선물 고마웠어요!” 하는 인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오누이가 좋아한다는 땅콩빵을 먹으면서도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기에 바쁩니다. 선물을 받을 때에도 무슨 선물일까 궁금해 하며 열어 보기 바빴을 뿐이듯, 밥상머리에서도 “할머니도 와서 함께 먹어요!” 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두 오누이 목도리 실을 끌러 새로 뜰 때까지도 할머니를 부르지 않고 저희끼리만 놀았습니다.
그림책 줄거리와 흐름과 끝맺음을 돌아보건대, 이렇게 철없는 오누이들 다툼질을 할머니가 잘 마무리지어서 다시금 사이좋은 오누이가 되었다고 ‘가르침’을 베푸는 얼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오누이부터 오누이를 기르는 아빠엄마 모두 옳게 살아간다고 하기 힘듭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밝게 뛰노는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참된 사랑이나 믿음이나 나눔이란 귀퉁이 한 자락에도 깃들어 있지 않아요.
내 밥그릇에만 눈길이 머뭅니다. 내 손아귀에만 눈썰미를 둡니다. 내 몸치레에만 눈높이를 맞춥니다. 슬픈 우리 삶이 어여쁜 그림책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습니다.
.. 치프와 초코는 할머니가 만든 땅콩 빵을 아주 좋아해요. 목도리 일은 까맣게 잊고 산처럼 쌓인 땅콩 빵을 먹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아까 둘이 왜 울었는지 듣고는 좋은 생각을 해 냈습니다. 할머니는 둘의 목도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 (20∼21쪽)
문학책에서야 어찌어찌 다루어도 된다고 하지만, 뜨개질을 아무리 잘하는 분이라 하여도 목도리 둘을 후딱 뜰 수는 없는 노릇인데, 어찌 되었든 그림책에서는 아이들이 땅콩빵을 먹는 짧은 동안에 할머니가 목도리 둘을 ‘짠!’ 하고 만들어 냅니다. 아이들은 노랑과 빨강이 알록달록 어우러진 목도리를 새로 받아들고는 기뻐합니다. 이때에도 어김없이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목도리요, 그냥 후딱 뜰 수 있는 목도리인 듯 여깁니다.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그림결이며 오누이가 이래저래 시샘하고 다툼질을 하다가도 잘 끝난다는 줄거리라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림책이라고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두 오누이를 불러 “얘들아, 이 목도리란 말이지, 할머니가 너희 오누이를 사랑하면서 한 땀 한 땀 떴단다. 노란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뜻과 사랑을 담고, 빨간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넋과 믿음을 담았지.” 하면서 노란 목도리는 얼마나 노랗게 아름답고 빨간 목도리는 얼마나 빨갛게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할 수 없었나 싶어 아쉽기도 합니다. 또한, “할머니가 너희한테 노란 목도리와 빨간 목도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말도 안 하고 주어서 다투었구나. 할머니가 생각이 짧아서 미안하구나.” 하면서 할머니가 참다운 슬기를 뽐내는 얼거리로 뻗어나가지 못해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만큼으로 마무리짓는 그림책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만큼으로 이루어 낸 그림책이어도 반갑습니다. 이만큼이나마 했어도 고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이만큼이나 돌아보거나 살필 겨를이 없이, 몹시 바빠맞도록 돈벌이에 매여 있는 탓입니다.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는 할머니를 기쁘게 맞이할 딸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아쉬운 우리 삶에 걸맞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그림책이라 할 터이나, 아쉬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예쁘고 곱고 재미나고 뜻있기까지 한 그림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기겠다고 봅니다.
이 그림책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 그림책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으며 더 너른 따스함을 꽃피울 수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이야기감을 더 좋은 그림틀에 실어내면서 더 따사롭고 넉넉한 품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를 껴안고 어루만지는 훌륭한 그림책을 새삼 기다리고 손꼽아 봅니다. (4343.3.29.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