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 전민조 사진집
전민조 지음 / 평민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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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만들어 준 얼굴을 찍는 즐거움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4] 전민조, 《농부》


- 책이름 : 農夫
- 사진 : 전민조
- 펴낸곳 : 평민사 (2009.8.30.)
- 책값 : 4만 원


 (1) 사람들이 만들어 주는 얼굴


 엊저녁 몹시 고단하고 지친 가운데에도 빨래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옆지기는 홀로 집에서 아기를 보면서 빨래를 한 점도 하지 못합니다. 아기 아빠는 돈을 벌려고 서울로 일을 나온다지만, 돈을 버는 일이라기보다 한글학회에서 우리 말과 글을 다루는 큰일 한 가지를 넘겨받느라 아기돌보기를 한동안 미룬 채 올 12월까지만 힘들게 살기로 했습니다. 살림돈이야 어떤 일을 하든 못 벌겠습니까. 우리 세 식구는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은 돈을 쓰며 꾸리는 삶보다, 우리한테 알맞춤하게만 돈을 벌어 쓸 만큼만 쓰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손길이 있어도 굳이 사무실에 나가는 일을 안 한 까닭은, 더 많은 돈을 벌다가는 우리 마음이 흐트러질 수 있는 한편(그러나 이렇게 해서 흐트러지는 마음이라면 이렇게 안 해도 흐트러지리라 봅니다), 이보다는 아이를 엄마와 아빠가 곁에서 함께 돌보는 일이 몹시 아름답고 즐겁고 거룩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아기가 돌을 맞이할 때까지는 엄마와 아빠가 아기와 하루 내내 함께 붙어 지내면서 돌보았습니다. 우리 세 식구는 적어도 서너 해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다른 식구들이 보기에는 ‘애 아빠가 한 해 동안 집에서 온갖 일 다하며 아기를 본 일’만 해도 대단하다고 여기겠지요. 이리하여, 남들한테는 ‘회사 다니며 일하기’로서는 짧다는 넉 달일 테지만, 우리 식구한테는 아기 아빠가 넉 달이나 인천에서 서울로 일을 나가는 삶이 몹시 길고 고단합니다. 아기 아빠가 집에서 집 안팎 살림을 모두 치러낼 때에도 고단함이 가득했는데, 집 바깥으로 나가면서 집 안팎 살림을 모두 짊어지려 하니 몸뚱이 하나로는 남아나지 않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밥하고 빨래하고 짐 꾸려서 지옥철에 시달리며 서울로 간 다음, 눈코 뜰 사이 없이 일을 하다가 도시락 까먹고 쉴 틈 없이 일하고 나서, 다시 지옥철에 들볶이며 인천으로 와서는, 아기하고 밤마실을 하고 보리술 한두 병 마신 뒤에, 그 사이 늘어난 빨래를 마저 하고 아기 씻기고 잠들라치면 두 팔과 어깨와 다리에는 아무런 힘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그 좋아하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거의 하지 못합니다.

 아주 곯아떨어지듯 잠자리에 드는데, 그렇게 잠자리에 들면서도 한밤에 옆지기가 “여보, 기저귀 좀 갈아 줘요.” 하고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알아채고 벌떡 일어납니다. 기저귀를 갑니다. 그러고 다시 곯아떨어집니다.

 오늘 새벽과 아침에도 지난 한 달과 똑같은 하루를 되풀이하며 지옥철에서 시달립니다. 제 왼쪽에는 양복쟁이 젊은 사내가 다리를 쩍 벌린 채 앉고, 제 오른쪽에는 이어폰 꽂고 다리 덜덜 떠는 젊은 사내가 또한 다리를 쯔억 벌린 채 앉습니다. 오늘은 이레 만에 자리를 겨우 얻어 앉아서 서울로 가는데, 겨우 한 번 앉아도 이 모양이니 괴롭습니다. 한참 꾹 참으며 가다가 부천역에 이르러, 두 팔을 뻗어 왼손으로는 왼쪽 자리 젊은 사내 허벅지를 꾹 잡고 오른손으로는 오른쪽 자리 젊은 사내 허벅지를 꽉 잡은 뒤 옆으로 쑤욱 밉니다. 두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미안해 하는 빛을 띱니다. 그나마 미안한 줄은 아나 보지? 두 사내가 들을 수 있도록 ‘에휴!’ 하고 크게 한숨을 쉽니다. 읽던 책을 마저 펼칩니다. 만화책 《빛의 바다》를 다 본 다음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고 하는 소노 아야코 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마침,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잘 맞지 않는 상대와는 무엇이든 무리할 필요가 없다. 어디라도 좋으니 의기 투합하는 회사를 찾아 그곳에서 일하면 그만이다(36쪽).”는 대목을 읽었지요. 다음으로는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추하다고 느끼거나, 때로는 업신여기고 싶은 마음으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38쪽).”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이 대목까지 이른 다음에, ‘이 볼썽사나운 녀석들한테 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데로 갈까?’ 하는 마음을 버렸습니다. ‘내가 이 자리를 비운다 한들 이 녀석들은 똑같이 이렇게 살 테니까.’ 하고 생각하며, 전철에서 ‘옆에 남자가 앉든 여자가 앉든 다리 쩍 벌리는 짓’이 얼마나 버르장머리없는 노릇인가를 일깨워 주되, 아주 부드럽게 일깨워 주자고 다짐했습니다.

 ‘허벅지 콱 집어서 밀기’를 하고 나서는 자리가 널널해졌습니다. 널널해진 자리를 즐기며 신길역에서 갈아타고 서대문역에서 내리기까지, 사람과 사람한테 다시금 들볶이다가 문득, ‘웬만한 한국사람은 어릴 때부터 너무 바쁜 쳇바퀴에 갇혀 치이고 밀리고 들볶이고 시달리면서 제 삶을 잃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멀쩡한 두 다리를 놓고 자동계단이나 승강기만 타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사람들 스스로 이렇게 되어 가는 동안, 이 사람들한테서 어떤 다름(개성)을 찾을 수 있겠느냐 싶습니다. 검고 하얀 빛깔만 가득한 서양 차린옷을 갖춘 ‘남녀 회사원’ 매무새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나면, 똑같은 삶자락과 똑같은 밥버릇과 똑같은 공짜신문과 똑같은 텔레비전과 똑같은 은행계좌와 똑같은 여행계획과 똑같은 아파트+자가용 꿈에 매이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손전화 사진기’이든 ‘디에스엘알’이든 ‘똑딱이’든, 갖가지 사진기가 많이 팔리고 널리 쓰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이 쏟아지는 우리 나라인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은 쏟아지나, 정작 ‘다름’을 느낄 사진은 없는 가운데, 한결같이 판에 박은 사진만 넘치는 까닭은 이런 도시내기 삶에서 비롯하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저 또한 도시내기라 할 테지만, 도시 한복판이 아닌 변두리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죽 살아왔고, 옆지기하고도 골목동네에서 살림을 이루었고 아기도 골목동네에서 낳았습니다. 아기를 기뻐해 주고 반겨 주는 사람은 하나같이 골목동네 이웃입니다. 저잣거리를 마실하든 골목을 거닐든, 골목동네 이웃은 우리 아기와 세 식구를 따숩게 맞이해 줍니다. 이러는 동안 제 사진은 저절로 ‘골목길을 내 삶 그대로 느낀 모습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자’고 생각합니다. 꼭 얼굴사진을 환하게 웃는 빛으로든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빛으로든 담아야 ‘골목길 사람들 사진’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 얼굴이나 몸뚱이 하나 깃들지 않아도 얼마든지 ‘골목길 사람들 사진’이 된다고 깨닫습니다. 우리 둘레 어디에도 사람 손길이 타지 않은 자리가 없으니까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고 느껴야 하며 껴안아야 하고 널리 나누어야 할 모습이란 다름아닌 사람 냄새요 사람 목소리요 사람 빛깔이니까요.
 

















 (2) 사람을 보는 얼굴과 본 그대로 담는 손길


 지난 9월 10일부터 오는 9월 23일까지, 서울 중구 저동2가에 자리한 〈갤러리 M〉(02-2277-2436)이라는 곳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삶터’를 담은 사진잔치가 열립니다. 사진을 찍은 이는 사진기자로 정년퇴직을 한 전민조 님입니다. 전민조 님은 이제까지 숱한 사진책을 펴냈습니다.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던 때에는 《얼굴》(평민사,1985)과 《서울스케치》(눈빛,1992)와 《이 한 장의 사진》(행림출판,1994)과 《가짜사진 트릭사진》(행림출판,1999)과 《그때 그 사진 한 장》(눈빛,2001)을 펴냈습니다. 사진기자로서 이렇게 사진책을 많이 낸 분은 더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기자 일을 마치고 ‘사진작가’로 달라진 다음부터는, 《아무도 오지 않는 섬》(눈빛,2005)을 비롯해 《서울》(눈빛,2006)과 《한국인의 초상》(눈빛,2007)과 《사진이야기》(눈빛,2007)와 《기자가 본 기자》(대가,2008)를 해마다 잇달아 펴냈습니다.

 저는 2005년 ‘섬’ 사진잔치 때부터 전민조 님을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004년까지는 사진책으로만 전민조 님을 뵈었는데, 2006년과 2007년에도 사진잔치 자리에서 즐겁게 얼굴을 마주하며 사진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08년에는 우리 아기가 태어나던 무렵에 사진잔치를 하시는 바람에 미처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2009년 가을에는 조금 느긋해져서 저 혼자 사진잔치에 찾아갑니다. 전민조 님은 틀림없이 2010년에도 새로운 사진감으로 사진잔치를 벌이실 테니, 그때가 되면 우리 세 식구는 서로 손을 맞잡고 신나게 사진잔치 마실을 갈 수 있겠지요.


.. 농부와 소는 비에 젖지 않게 온통 비닐로 칭칭 감겨 있었다. 밀짚모자와 헤진 검은 잠바를 비닐로 덮고 소 잔등에까지 감기에 걸리지 않게 찢어진 비료 비닐이 감겨져 있었다. ‘자연의 농부’를 드디어 발견한 것 같았다. 빗물이 흥건하게 고인 논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쟁기가 거침없이 헤쳐 나갔다. 몇 번 무거운 쟁기질에 소는 이내 거친 숨을 내뿜고 농부의 발걸음도 비틀거렸다. 쟁기와 소 걸음이 철퍼덕거릴 때마다 흙탕물이 렌즈에까지 튕겨 왔다. 오직 퍼붓는 비에 카메라에 젖으면 낭패다 싶어 한 장을 찍으면 얼른 카메라를 재킷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꺼내서 찍는 등, 앉아 찍고 서서 찍고, 움직이는 농부를 쫓아 셔터를 누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농부는 흔한 쟁기질인데 촬영자가 비를 흠뻑 맞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우스운지, 잠시 쟁기질을 멈추고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소” 하며 빙그레 웃었다 ..  (찍은이 말/전민조)


 9월 10일 저녁 여섯 시, 〈갤러리 M〉에는 숱한 사진작가와 사진학과 교수가 모여들었습니다. 2005년부터 이어진 다섯째 사진잔치를 기리는 발길이 웅성웅성 모여들었습니다. 지난 2005년과 2006년에는 너무 초라하고 쓸쓸하게 사진잔치를 했던 일을 떠올리면 사뭇 다릅니다. 2005년과 2006년에는 ‘사진을 아주 좋아하는 몇몇 사람’만 알음알이로 찾아와서 당신한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말이에요, 이렇게 늘 사진기를 갖고 다녀야 해요. 자, 보세요, 저도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어깨에 사진기를 메고 있지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해요. 언제든지 사진기가 내 몸 일부가 되어 붙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사진기를 늘 갖고 다니려고 이렇게 조그마한 녀석을 하나 들고 다니지요.” 하는 말씀을 알뜰히 들었습니다. 사진밭에서 이름 크게 나거나 이름 널리 날리는 이들이 찾아와 당신을 기리거나 기뻐해 주지 않았으나, 이 나라 곳곳에서 조용히 사진을 즐기는 낮은자리 사람들이 눈빛을 말똥말똥 빛내면서 ‘사진하는 매무새’를 깊이 새겨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잡은 사진 주제에 따라서 사진기를 다르게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저는 그때그때 스냅으로 사람들 삶을 찍기 때문에 이만한 작은 사진기 하나가 가장 좋아요.”

 2009년 9월 10일 자리는 전민조 님 당신 삶과 생각을 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당신 삶과 생각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 다섯 해 사이에 여러 가지 사진책을 펴낸 전민조 님이기 때문에, 이 사진책에 당신 삶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냈으니 책을 스스로 펼쳐 읽으면 되거든요. 꼭 ‘입’으로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고 말을 해 주어야만 ‘전민조 사진밭은 이러하다!’ 하고 알아챌 수 있지 않습니다. 우리 두 눈으로 몸소 사진을 들여다보면 시나브로 ‘전민조 사진바탕은 이렇군요!’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전민조 님은 당신 사진잔치에서 당신 말씀을 아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한테 큰 어르신이라며 이명동 님한테 한 말씀을 여쭙니다. 그러고 사진작가 윤주영 님한테도 한 말씀을 여쭈지만 윤주영 님은 손사래를 칩니다. 강운구 님은 멀찌감치 물러서서 뒷짐을 지고 구경하다가 〈갤러리 M〉 관장한테 꾸지람 한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전민조 선생은 사진 아래쪽에 자기가 사진을 찍은 날짜와 찍은 곳을 손으로 적어 놓는데, 액자에 그 글씨가 가려진 데가 많으면 어떡해?”

 이명동 님 말씀이 끝난 다음에는, 이번 사진잔치 “농부”가 있도록 해 준, 전북 남원 대산면 풍촌리 농사꾼 모씨 할아버지네 아들들을 앞으로 모시고 한 말씀을 여쭙니다. 세 형제 모공식, 모정식, 모중식 님은 방명록에도 나란히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세 형제는 아버지 뒤를 이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사진잔치에는 따로 안 걸렸지만, 사진잔치와 함께 나온 사진책 《농부》에는 ‘농사꾼 모씨 할아버지 아들 부부’가 그곳에서 그대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자취가 하나하나 담겨 있습니다.


.. 나는 농부의 얼굴을 촬영할 때까지는 어떤 혹독한 대가도 달게 받으며 몸으로 찍는 놀랍고 뜨겁고 특별한 사진들을 항상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농부의 얼굴을 찍은 시간부터는 그런 특별한 사진들이 얼마나 그릇된 생각인가를 알게 되었다. 오직 자연에만 몸을 맡기고 웃는 농부라는 직업에 무한한 존엄성을 느꼈다. 그러면서 힘든 일도 힘든 줄도 모르고 걸어가는 농부라는 직업은 수많은 직업 중에 최고의 직업이며 군자 같은 직업으로 여겨졌으며, 유순한 소 역시 인간과 운명을 함께하는 수많은 동물들 중에 최고의 군자 같은 동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  (찍은이 말)


 무슨무슨 교수님과 작가님 들이 한창 막걸리와 떡과 고기를 즐기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모두들 사진밭 큰 어르신들인데 어깨나 손에 사진기를 쥐거나 안은 분은 거의 안 보입니다. 한결같이 양복을 차려입은 가운데, 저와 몇몇 사람은 어깨에 사진기를 메고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었던 이들도 떡과 고기와 술을 맛보기에 바쁘지만, 저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사람물결이 빠져나가는 흐름’을 지켜봅니다. 해가 아직 하늘에 걸려 있을 때 밖으로 나와 사진 한 장 찍고, 뉘엿뉘엿 기울 때 다시 한 장 찍으며, 아주 저문 뒤에 또 한 장 찍습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사진틀을 등이나 팔꿈치나 손으로 치거나 긁거나 미는 모습’을 쓰디쓰게 바라봅니다. 조그맣고 조촐한 잔치마당인데, 너무 많은 손님이 찾아왔구나 싶은 한편, 즐거움을 나누는 도르리 같다면 흐뭇하겠다 싶으면서도, 이래서는 사진을 사진대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발디딜 틈이 없던 전시장에 사람이 하나둘 빠져나갑니다. 저마다 이런 약속 저런 일정이 있어 떠납니다. 조금씩 넓어지는 전시장을 여러 차례 되짚으며 사진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봅니다. 북적거릴 때에 보는 사진하고 조용할 때에 보는 사진이 퍽 다르구나 싶습니다. 어지러이 어수선할 때에는 훌렁훌렁 넘겨야 했던 사진이나,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는 몇 분 동안 사진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습니다.

 스무 점 안팎 걸린 사진을 몇 분씩 차근차근 돌아보는 사이, 이제는 전민조 님 식구와 가까운 벗을 빼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북새통은 사라지고 오붓한 이야기마당이 펼쳐집니다. 전시장에 들어올 때 32000원에 사들인 책(전시장에서는 20% 에누리해서 책을 팝니다)에도 실린 사진이라 하지만, 작은 크기로 볼 때하고 2미터짜리 큰 사진을 볼 때에는 같지 않습니다. 가장 크게 걸린 사진 앞에서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고개를 돌리면서 들여다보다가, ‘소한테 비닐을 씌워 비오는 날 쟁기질을 하는 농사꾼’ 뒤로 이 농사꾼하고 똑같이 ‘소한테 비닐 씌우고 스스로도 비닐 뒤집어쓰고 쟁기질하는 다른 농사꾼’이 여럿 보입니다. ‘아, 그렇구나!’

 다른 사진을 처음부터 다시 돌아봅니다. 이날 비를 맞으며 쟁기질을 하는 농사꾼은, 모씨 할아버지만이 아니라 꽤 많습니다. 그러나 전민조 님은 다른 농사꾼이 아닌 ‘모씨 할아버지와 일소’ 하나만을 알아보았고, 이 한 곳에서 한 시간 넘게 비를 맞으며 필름 석 통을 찍었다고 했습니다.

 다 찍을 까닭은 없었겠지요. 농사꾼은 어디에나 흔히(?) 있었겠지요. 지리산 가는 길이 아니더라도 있고 경기도에도 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일소를 부리며 쟁기질하는 농사꾼은 널려(?) 있었겠지요. 사진기자만이 아니라 사진작가도 많고, 이 나라 곳곳에 사진모임이 수두룩하게 있는 가운데 사진전람회나 사진공모전도 수없이 있었겠지요.

 아까, 사람들 북적이던 때, 어느 신문사 기자가 “그림 좋게 거기 사진 주인공들하고 나란히 서서 사진 설명 좀 해 줘요.” 하고 부탁할 때 전민조 님은 “뭐, 다 아는 이야기인데 또 설명을 해?” 했고, 사진기자는 다시 “그래야 좋은 사진이 나오지요.” 했습니다. 전민조 님은 허허 웃다가 “이렇게 찍는다고 하니 다시 한 번 서 주셔야겠네요.” 하고 농사꾼 손님을 사진 앞에 세웁니다. 사진기자가 ‘서 달라는 대로 서 주며’ 이야기를 다시 들려줍니다. 늦게 온 사진기자는 기사에 써야 한다면서 ‘그림 만들기’를 바라는 판인데, 사진기자로 온삶을 보내다 정년퇴직한 전민조 님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자연이 만들어 준 얼굴을 찍는 즐거움, 저는 이것 때문에 농부를 사진으로 찍으면서, 이게 제 사진이 걷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님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나도 기자였지만, 기자들이 말야, 약속을 해도 약속을 안 지켜. 전시회 소식을 써 준다고 하면서도 다 잊어버리고 안 쓰지.” 하고 넌지시 한 마디를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빙그레 웃다가, 전민조 님한테 부탁 한 말씀을 드립니다. “전민조 선생님, 이제는 인천에서도 마흔 해 만에 사진잔치를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어릴 적에 살던 고향으로 사진이 한 번쯤 돌아올 때가 된 듯해요.”

 일본에서 태어나고 부산에서 어린 날을 보낸 다음 인천으로 와서 동산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나중에 서울로 살림집을 옮기기 앞서까지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했던 전민조 님은, 첫 번째 사진잔치를 1967년에 인천에서 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1985년, 2001년 모두 서울에서 사진잔치를 했고, 당신 성장기를 보낸 고향에서는 당신 사진을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인천이라는 터전에서 문화와 예술을 하든, 교육과 행정을 하든, 정치와 과학을 하든, ‘자연이 스스로 빚어내는 얼굴’ 그대로 살아가는 분이 드문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연이 스스로 빚어내는 얼굴을 애틋하게 부둥켜안거나 사랑스레 껴안는 몸짓이 너무 적은 탓이 아니랴 싶습니다.

 삶 한자락을 고이 담는 전민조 님 사진은, 자연을 찍는 즐거움뿐 아니라 자연을 나누는 사랑스러움을 보여주는 한 방울 눈물입니다. (4342.9.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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