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98 : 책에 담는 땀방울, 책을 읽는 눈물방울

 얼결에 한글학회로 일을 나온 지 보름이 넘었습니다. 그 좋아하는 골목마실 헌책방마실 못하며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에서 시달립니다. 그래도, 이 지옥철에서 비지땀 뻘뻘 흘리며, 그동안 못 읽고 미루어 둔 책을 하나하나 읽어치웁니다. 뒤늦게 마지막 쪽을 덮은 책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합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장만하던 몇 해 앞선 그때 다 읽었으면 내 삶과 생각과 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좋은 책을 일찌감치 읽었으니, 저는 참으로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또는, 이제서야 읽게 되었기에, 지난날에는 줄거리만 훑고 덮어놓았을 책을 곰곰이 되씹으며 새삼스레 붙잡을 수 있을까요.

 예나 이제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옥철에서도 책을 붙잡습니다. 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예나 이제나 느긋하고 시원하고 따뜻한 곳에서도 안 읽습니다. 전철역 나들목에서 나누어 주는 공짜 신문을 조금 들여다보다가 멀뚱멀뚱 선 채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로서는 출퇴근길 세 시간이 몹시 아까워 한 줄이라도 더 읽으려고 발버둥이지만, 거의 모든 분들한테 출퇴근길은 지루하고 지겹고 고단해서 얼른 벗어나기를 바라는 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책 나온 소식과 인터넷책방 맛보기로는 퍽 눈에 뜨이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를 아침길에 1/3쯤 읽습니다. 읽다가 자꾸 짜증이 나지만 사람들한테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면서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내지 못합니다. 시베리아에 붙들린 서글픈 사람들 눈물방울을 담아내려고 한 책이라 하는데, 눈물방울은 그닥 보이지 않고 꽤 지루한 근현대 역사 이야기가 잔뜩 늘어집니다. 다른 책에 얼마든지 나와 있는 이야기를 굳이 덧붙여 실어야 했는지 궁금합니다. 정작 해야 할 말이 이런 자질구레한 군말 때문에 묻히지 않느냐 싶어 안타깝습니다.

 저녁길에 어린이책 《바람과 나무의 노래》를 읽다가 코끝이 찡합니다. 눈물이 어립니다. 아침길에 느낀 아쉬움을 갚습니다. 하루 동안 쌓인 고단함을 풀어 줍니다. 밀리고 치이고 밟히는 가운데 눈물바람이 되고 싶지 않아 한동안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꽤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데, 글줄 하나마다 글쓴이 온힘과 넋이 담겨 있다고 느낍니다. “‘곧장 되돌아가!’ 나는 자신에게 명령했어요. 하지만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말이죠. 상쾌한 바람이 불고, 도라지꽃이 저 멀리까지 한없이 피어 있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그냥 돌아가다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어요.(9∼10쪽)” 지옥처럼 바뀌고 마는 전철길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어서 벗어나고프다고만 생각하고, 나와 살을 비벼야 하고 코앞에 얼굴을 부벼야 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느끼기 어려울까요. 모든 회사원이 지옥철이 아닌 하늘나라 꽃길이나 구름길을 거닐면서 일터를 오갈 수 있다면, 모든 학생이 새벽길이나 밤길이 아닌 햇볕 따사롭고 바람 시원하며 싱그러운 나들이길을 거닐며 학교를 오갈 수 있다면, 우리 삶터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까 하고 생각에 젖습니다. 인천 서쪽 끄트머리에 가까워 오니 전철 손님이 많이 줄고, 다시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 (4342.9.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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