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자가용+돈’을 버려야 책을 읽을 수 있다
 ― 책읽기와 자꾸 멀어지는 우리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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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어 버릇하는 사람이 책하고 멀어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 밴 땀과 피와 눈물과 웃음을 읽어내는 사람이 책하고 담 쌓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서 늘 배우며 고개숙이는 사람이 책이 들려주는 속깊은 이야기에 눈물짓지 않거나 웃음짓지 않는 일이란 없습니다. 새로운 책을 꾸준히 찾는 사람이 지나간 책 또한 꾸준히 안 찾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책마다 다 다르게 담아내고 있는 알뜰한 빛줄기를 놓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책에 길이 있다면 있고 길이 없다면 없습니다. 책에 길이 있다고 느끼면 이 길을 잘 찾아서 갈 노릇입니다. 책에 길이 없다고 느끼면 제 깜냥껏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길이 다른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이 살피며 부지런히 찾아나설 노릇입니다.

 찾아나서는 사람한테만 찾아지는 길입니다. 만나려 하는 사람한테만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느끼려 하는 사람한테만 느껴지는 길입니다. 보려고 하는 사람한테만 보여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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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본욕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라면 ‘어떻게’ 각자 입에 맞게 먹느냐 하는 것이 결코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교묘한 대중조종을 통한 입맛의 전체주의화는 오히려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김장을 앞두고 집집마다 신경을 쓰고 있다. 이 김장에는 규격화나 획일화를 가장 꺼려야 하지 않을까. 함흥댁의 짜릿한 김치맛, 평양댁의 찡한 동치미맛, 선산댁의 맵싸한 젓갈김치맛에서 우리는 지방의 고유한 멋을, 그리고 한 주부의 독특한 솜씨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산업화니 근대화니 하는 깃발 아래서는 모든 것들이―건물이니 행동양식ㆍ사고방식까지 획일화되고 규격화됨으로써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원해야 할 대중사회나 전체주의사회로 말려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  《한완상-증인 없는 사회》(민음사,1976)


 집밥을 얻어먹는 일이 아주 힘들어집니다. 바깥밥은 언제 어디서나 아주 손쉽게 얻어먹을 수 있고 사먹을 수 있습니다(돈만 있다면). 그러나 바깥밥을 얻어먹든 사먹든, 우리 식구 입맛에 맞출 수 있는 바깥밥을 찾는 일은 대단히 힘듭니다. 거의 이룰 수 없는 일이 아니랴 싶기까지 합니다(우리 몸에 거스르지 않는 밥거리로 마련한 밥을 찾기 어려우니까). 그러면서도 바깥밥집은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합니다. 어쩌면, 똑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인천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춘천이든 전주이든 제주이든 목포이든 군산이든 마산이든 대구이든 진주이든 울산이든 …… 똑같은 체인점에 똑같은 차림표에 똑같은 반찬에 똑같은 흰쌀에 똑같은 맵고 짠 양념에 똑같은 부피까지 …… 인천에서 먹기에 인천다움을 느낀다든지, 서울에서 먹기에 서울다움을 느낀다든지, 대전에서 먹기에 대전다움을 느낀다든지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밥 한 그릇도 빵 한 조각도 술 한 잔도 매한가지입니다. 도드라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밥뿐 아니라 집도 똑같습니다. 인천사람들 살림집이나 서울사람들 살림집이나 부산사람들 살림집이나 순천사람들 살림집이 다르지 않아요. 모두들 ‘건축회사 이름만 다른’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스무 해나 서른 해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서 새로 지어야 할 아파트로 바뀌고 있으며, 온갖 최첨단시설을 갖추었다는(그래 보아야 몇 해 지나면 다 낡아빠진 시설이 되고 마는) 아파트로 옮기고 있습니다.

 밥과 집이 똑같은 한편, 일거리와 놀이거리가 똑같습니다. 온나라 구석구석을 다녀 보아도 사람들 하는 일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느 자리에 가 보아도 웃고 떠들고 즐기는 놀이가 ‘새롭’거나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틀에 박은 듯하고 판에 박은 듯합니다(예전에는 공기놀이를 하건 고무줄놀이를 하건 술래잡기를 하건 마을마다 달랐습니다). 하긴, 말이 사투리이지, 소리값 높낮이와 말소리 길이만 조금 다른 오늘날 사투리는 사투리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멋쩍고 남우세스럽습니다.

 가만히 살피면, 서울대를 나오든 인천대를 나오든 부산대를 나오든 제주대를 나오든, 사람들 지식이 똑같습니다. 지식 높낮이는 다를는지 모르나, 얼마나 다른지조차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자기 머리속에 가둔 지식을 다루는 매무새마저 어슷비슷합니다.

 지식만 똑같느냐 싶으면, 생각도 똑같고 마음도 똑같고 가슴마저 똑같습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빨리 더 큰 아파트를 따내어 사들여야 하며, 더 빨리 더 잘생기고 예쁘장한 짝꿍과 사귀어야 하는데다가, 텔레비전 연예인 옷차림이 달라지는 데 따라서 제 옷차림과 몸차림을 바꾸느라 바쁩니다.

 하다 못해 라면 한 그릇 끓이면서 파나 달걀을 넘어 연뿌리나 감자나 고구마나 버섯이나 쑥이나 오징어나 당근 따위를 썰어넣을 생각을 해 보지 못합니다. 다문 밥 한 그릇을 집에서 손수 지어도, 쌀에 씨눈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느낀다든지, 누런쌀로 지어 본다든지, 콩이나 팥을 넣어 본다든지, 콩을 넣는다면 어떤 콩을 얼마나 넣는다든지, 수수나 보리나 기장이나 옥수수나 조나 율무를 넣어 본다든지, 보리를 넣으면 밀보리를 넣는지 찰보리를 넣는지 누른보리를 넣는지 쌀보리를 넣는지 따위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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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 삶은 책하고 멀어지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는 책하고 담을 쌓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매무새는 책하고 등돌리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밭과 마음결과 마음눈은 책은 도무지 몰라도 된다고 하는 길입니다.

 똑같은 아파트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손에 쥘 까닭이 없습니다. 책을 쥔다고 하여도 돈벌이를 다루는 처세(이른바 자기계발) 책입니다. 또는 텔레비전 연속극과 같은 책입니다. 시간을 죽이는 책을 읽지, 시간을 살리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열 번 백 번 되읽을 책이 아니라, 한 번 넘기고 나서 책꽂이에 꽂거나 재활용품 모을 때 폐휴지 사이에 끼워 버리는 책을 사들입니다. 책을 읽지도 못하고 보기만 하지만, 이제는 넘기거나 들추는 눈높이가 되어 버립니다.

 똑같은 자동차를 굴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가방에 늘 넣어 놓고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굴리면서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펼쳐야 지도책이지만, 네비게이션이 나오는 만큼 길그림 담은 책마저 펼칠 일조차 없습니다. 펼쳐야 스포츠신문이었지만, 네비게이션이 텔레비전 구실까지 하고 있으니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면 곧바로 운동경기를 차를 몰면서 볼 수 있습니다. 책이란 따분하고 지루하고 지겹고 번거로운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똑같은 회사원(사무직이든 영업사원이든)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책을 알아보려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책을 읽어야 할 일이 있으면 인터넷을 또닥거리면서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좀더 싼 책을 알아봅니다. 자기 마음을 살찌울 만한 ‘또 다른 책이 있을까’를 알아보지 않고, ‘꼭 사야 한다고 하는 그 책을 좀더 싸게 파는 곳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데에 시간을 바칩니다. 이리하여 다문 몇 백 원부터 몇 천 원을 몇 시간(적으면 몇 분)씩 들이면서 아낀다고 할 텐데, 우리가 아끼는 그 돈 몇 푼은 우리 삶에 얼마나 보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판이 끊어져서 헌책방과 도서관에만 있는 책들은, 또 인터넷 장사를 하지 않아서 인터넷 목록에 올려지지 않는 책들은, 또 인터넷 장사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차츰 안 찾게 되어’구태여 인터넷 목록으로 올리지 않는 책들은,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조금도 알아챌 수 없고, 알아챌 까닭마저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똑같은 지식을 갖추고, 똑같은 대학졸업장을 가지려 하며, 똑같은 연봉을 받고, 똑같은 아파트에서, 똑같은 자가용을 굴려, 똑같은 서울이나 서울 비슷한 큰 도시에서, 똑같은 사무직 또는 영업직으로 돈만 버는 일을 하는 가운데, 예나 이제나 사회평등이나 남녀평등이나 계급평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프게 소비물질문명에 젖어들어 가는 이 나라에서는, ‘다 다른 지식과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꿈과 다 다른 길과 다 다른 사람’을 보여주는 책이란 한낱 부질없는 가을철 가랑잎 한 닢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을날 떨어져 스스로 거름이 되어 이듬해 봄에 새잎이 돋게 해 주는 힘이 되는 책 하나임을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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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스스로 책을 읽으려면, ‘똑같은 아파트’를 버리고 ‘다 다른 골목집’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을 가까이하려면, ‘똑같은 자가용’을 버리고 ‘다 다른 자전거와 두 다리’를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을 사랑하자면, ‘똑같은 바깥밥’을 버리고 ‘다 다른 집밥’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책마다 담긴 고운 빛줄기를 가슴으로 껴안으려면 ‘똑같은 돈’을 버리고 ‘다 다른 눈물과 웃음’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똑같은 틀에 매여도 다 다른 책을 찾아나설 수 있기도 할 테고, 똑같은 틀에 매인 가운데에도 책사랑을 이을 수 있습니다.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똑같은 틀에 매이고 있는 우리들이 보여주는 책사랑은 무엇이며, 똑같은 판에 짜여진 우리들 손에 쥐여진 책이란 무엇인가요. 지식이 아닌 지식을 다루는 마음을 담아내는 책임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요. 지식이 아닌 삶이 녹아나는 책임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가요. 지식이 아닌 이야기가 서리는 책임을 얼마나 곱씹고 있는가요.

 개성이란 ‘케이에프시와 롯데리아와 버거킹과 맥도널드와 파파이스가 어떻게 다른 햄빵을 만들고 값이 얼마인가’를 알거나 즐기는 일이 아닙니다. 다양성이란 ‘아우디와 베엠베와 푸조와 오피러스와 크레도스와 그랜저가 얼마나 멋지거나 잘 빠진 차인가’를 가름하거나 누리는 일이 아닙니다. 푸르지오에 산다고 푸르게 사는 삶이겠습니까. 파밀리에에 산다고 온식구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겠습니까. 롯데캐슬에 산다고 군주가 되겠습니까. 타워팰리스에 산다고 무엇이 높아지는 삶입니까.

 손으로 만지작거려 종이 느낌을 헤아리면서 두 눈으로는 엮음새와 짜임새와 줄거리 들을 골고루 돌아보아 하나로 모두는 동안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곰삭여 펼쳐 보이는 책입니다. 글쓴이부터 책방 일꾼까지 숱한 사람들 땀방울과 피눈물이 담기는 책이기에, 우리 돈과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넋과 몸뚱이 모두를 움직여서 받아들여야 비로소 ‘책 하나로 비롯하여 책 하나로 마무리되된다’는 뜻과 값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많이 사서 읽을 수 없는 책이고, 시간이 넉넉하다고 느긋하게 읽을 수 없는 책이며, 머리가 똑똑하다고 더 잘 새겨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거나 빌리거나 책방이나 도서관에 선 채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쪼개고 나누어 바지런히 읽는 책입니다. 내 마음그릇이 모자라다는 아쉬움에 힘내어 지며리 읽는 책입니다.

 돈을 얻고 싶다면, 돈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시나브로 아파트로 기울고 자가용으로 기웁니다. 사랑을 얻고 싶다면, 사랑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차츰차츰 책으로 기울고 사람으로 기울며 자연으로 기웁니다. 이름값을 높이고 싶다면, 이름값을 높여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저절로 도시에서 회사원이 되려고 하고 대학졸업장을 따려고 하며 혼인하여 낳는 아이들을 제도권입시교육에 밀어넣게 됩니다. 믿음을 얻고 싶다면, 믿음을 얻어야 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가만가만 책으로 기울고 땀흘리는 낮은자리 일거리로 기울며 고즈넉하고 자그마한 골목집으로 기웁니다.

 책이란 그렇습니다. 삶에 따라 읽게 되는 책이고, 삶에 따라 달라지는 책입니다. 삶이란 그렇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에 따라 돈으로 기울는지 사람으로 기울는지 갈리게 되며, 제 마음바탕과 생각바탕에 따라 엇갈리는 삶입니다. 돈이란 그렇습니다. 가지려고 바둥거려 보았자 가질 수 없지만, 가지게 되어도 늘 허거퍼서 더 가지려고 안달이 되고, 가지고 있어도 즐겁게 쓰거나 나누거나 펼치는 아름다움을 찾지 못합니다. 삶이나 사람이나 사랑이 마무리가 아니라 돈이 마무리였기 때문에, 돈은 많아도 돈을 나누거나 쓸거나 베풀거나 함께하는 길을 조금도 몰라요. 대학교 졸업장이 마무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누구와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느냐’를 마무리로 삼아서 대학교 졸업장을 따든 말든 해야 하는데, 맨 먼저 대학교 졸업장을 앞에 놓고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으니, 머리는 굵어지고 지식은 늘어났지만 세상을 꿰뚫어보는 눈길은 조금도 기르지 못할 뿐더러 마음씨도 비뚤어집니다.

 책을 읽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 아름다워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훌륭해지거나 거룩해지거나 참된 멋을 가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배우면서 누리고, 믿음을 익히면서 나누며, 넉넉함을 몸에 들이는 가운데 펼치며, 따스함을 헤아리면서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목숨을 받은 기쁨을 깨닫고 싶기 때문이며, 한 사람 목숨이 얼마나 소담스러운가를 받아들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고 싶고 내 이웃을 알고 싶으며 우리 모두를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길을 즐기고 싶고, 이웃사람 길을 돕고 싶으며, 뒷사람 길을 닦아 놓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살찌우고 싶어 읽는 책입니다. 내 몸을 살리고 싶어 가까이하는 책입니다. 내 넋을 북돋우고 싶어 함께하는 책입니다. 내 사랑이 아름다워지도록 거듭나고 싶어서 껴안는 책입니다. (4341.12.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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