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광고와 신문 ‘한겨레’
 


 신문을 읽지 않은 지 몇 해인가 헤아려 보니, 2004년부터가 아니랴 싶습니다. 술집에서 굴러다니는 스포츠신문을 더러 넘겨서 야구와 배구 이야기를 들추곤 하며, 부산에 가면 부산에서 나오는 신문을, 춘천에 가면 강원도에서 나오는 신문을 사서 넘기곤 하지만, 따로 신문을 집에서 받아보지 않습니다.

 

 1988년에 이 땅에 태어난 〈한겨레〉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한글로 신문이름을 지을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워 했지만 딱히 들여다보지 못했고, 고등학생 때 길거리에서 몇 번 사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앞에서 신문딸배 노릇을 하면서 살 때, 다른 지국에는 들어가지 않고 〈한겨레〉 지국에 들어갔고, 1995년 4월 5일부터 1999년 8월 7일까지 일했습니다(중고등학생 때 〈중앙일보〉를 돌려 본 적이 있어서, ‘조중동 배달직원은 죽어도 안 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신문딸배를 그친 날부터 〈한겨레〉 정기구독을 했고,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다가 충주로 옮길 무렵인 2004년인가 2005년부터 정기구독을 끊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어느 신문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신문딸배를 하던 여러 해에 걸쳐서, 다른 지국과 신문 돌려읽기를 하면서 열 가지 일간신문을 날마다 읽기도 했습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야구와 배구와 핸드볼을 남달리 좋아해서, 이 운동경기 소식을 보고자 스포츠신문을 뒤적이기는 하지만, 〈한겨레〉에 실린 운동경기 소식은 뒤적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라도 운동경기 지식이나 소식에는 젬병이거나 뒤처지기 마련인데다가 잘못 나오는 때도 잦았습니다. 〈한겨레〉가 운동경기 이야기를 신문에 싣는다고 한다면, 다른 여느 신문과는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 텐데, 처음 운동경기 소식을 실을 때부터 햇수를 거듭하는 동안 조금씩 빛깔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비인기종목 소개가 굵직하게 나오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골프 이야기가 큼직하게 실렸고, 월드컵과 올림픽을 치를 때면 아예 다른 기사를 젖혀 두기까지 했습니다. 박찬호가 뜨면 박찬호를, 김병현이 뜨면 김병현을 다루었습니다. 요사이는 아마 김연아 선수 이야기를 그득그득 채울 테지요.

 

 세상흐름에 맞춰 가는 일이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흐름에 좇아 가는 일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한겨레〉가 태어날 때 돈과 마음과 힘과 손길을 보탠 사람들은 ‘그저 그런 찌라시 하나’로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신문다운 신문이 한 가지도 없다고 할 만한 이 나라에, 신문다운 신문으로 자리매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리하여 사상과 철학으로 따지면 좌파인 분과 우파인 분이 고루 모여서 〈한겨레〉를 빚어냈습니다. 좌파 지식인과 우파 지식인 가운데 겨레와 나라를 걱정하고 꿈꾸는 분들이 하나됨을 이루었습니다. 리영희 님은 좌파라 할 테지만 송건호 님은 우파입니다. 당신들 마음바탕을 이루는 생각은 갈릴지라도, 당신들 마음바탕을 꾸리는 매무새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가 되는 신문으로 〈한겨레〉를 빚어냈지, 둘로 셋으로 쪼개지라는(이를테면 연대파와 고대파 따위로) 신문으로 〈한겨레〉를 빚어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겨레를 말하고 나라를 말하는 신문인 〈한겨레〉로서 이 나라 낮은자리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신문으로 퍼졌습니다. ‘조중동 반대’는 곁가지일 뿐입니다. ‘조중동 반대’란, 이 세 가지 신문이 참된 마음으로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뿐더러, 거짓된 마음으로 겨레와 나라를 무너뜨리기 때문이었습니다.

 

 2004년인가 2005년에 〈한겨레〉를 끊을 무렵, 아니 이에 앞서도, 참 많은 이들이 〈한겨레〉를 끊었습니다. 제가 처음 〈한겨레〉를 돌리던 1995년에도 꽤 많은 이들이 〈한겨레〉를 끊었습니다. 끊은 까닭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한겨레〉가 맛이 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소리는 〈한겨레〉 기자나 경영진한테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기자와 경영진 모두는 자랑과 보람이 넘쳤으며, 50만 독자가 곧 100만도 넘고 200만도 넘으리라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이리하여, 낮은자리 독자들이 ‘왜 〈한겨레〉를 끊는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헤아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어느새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 분께서는 쇠밥그릇 놀이에 젖어서 여느 대기업 월급쟁이와 다름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여느 대기업 월급쟁이와 댄다면 달삯은 반토막밖에 안 되는.

 

 1998년이라고 떠올립니다. 그무렵에도 〈한겨레〉는 위기였습니다. 제가 처음 이 신문을 돌리던 1995년에도, 이에 앞서도 늘 〈한겨레〉는 위기였고, 나중에 구독을 끊을 때에도 위기였으며 요즈음도 위기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 위기 소리는 그치지 않으면서, 위기를 딛고 일어서려는 움직임은 영 보이지 않습니다. 달라지는 움직임은 너무 굼뜹니다. 그래, 그 1998년, 저로서는 그해가 참 잊을 수 없습니다. 그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로, ‘전국 3000 〈한겨레〉 배달직원이 의견광고를 내어 실었’던 일이 있습니다. 위기를 잘 이겨내기를 바라는 한편, 〈한겨레〉가 첫마음을 잃지 말기를 바라는 뜻으로, 맨 밑바닥에서 〈한겨레〉를 아끼면서 집집마다 돌리는 배달직원들이 푼푼이 모은 땀방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땀방울과 눈물겨운 목소리마저도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한테는 조금도 못 들어갔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맨 밑바닥에 있는 배달직원들한테 그 뒤로도 어느 한 번도 ‘〈한겨레〉라는 신문을 새벽바람에 잠도 안 자면서 돌린다’는 뿌듯함을 심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옳은 기사 똑바로 잘 써서 독자한테 부끄러울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우리들 배달직원 꿈을 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독자에 앞서 배달직원, 우리는 ‘딸배’라고 했습니다만, 이 배달직원은 기자보다도 신문기사 하나하나에 머리털을 곤두세웁니다. 말썽 많은 재벌기업 광고 하나가 실릴 때에도 독자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배달직원인 우리가 그 따위 놈들 광고를 받아서 싣지 않았건만, 독자들은 ‘본사로 전화를 걸어 봤자, 허구헌날 자동응답으로 넘어가거나 전화만 받는 여직원이 건성으로 들어넘기’니까, 가장 만만한 지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항의를 합니다. 그러고는 ‘신문 끊겠다’고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습니다. 골프채 광고가 나와도, 타이거 우즈인지 라이언 우즈인지 하는 사람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수놓아도, 누구보다도 우리 배달직원들 지국 전화기는 애먹습니다. 더욱이, 신문값을 걷으러 다닐 때면, ‘니들(한겨레)이 하는 꼬락서니하고 조중동하고 뭐가 달라?’ 하는 눈초리인데, 아무 잘못이 없는 배달직원인 우리들이, 〈한겨레〉 기자와 경영진 때문에 눈초리를 받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노릇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짜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키지 않았음에도, 1998년 겨울을 앞둔 쌀쌀한 밤에, 일산 어딘가로 가서 ‘한겨레 독자늘리기 캠페인 광고 모델’로 나갈 사진에 찍혀 주기도 했습니다. 1998년 한글날에 ‘신문배달 직원이면서도 없는 틈을 쪼개어 우리 말 운동을 하는 당찬 젊은이’를 기린다는 뜻에서 한글학회에서 한글공로상을 주었어요. 이 상으로 제 이름이 여러모로 알려졌는데, 늘 위기를 맞이하고 있던 〈한겨레〉로서는, 캠페인 광고를 해야겠다고 느꼈고, 이 캠페인 광고에서 저 같은 배달직원을 내세우면 좋을 듯하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이리하여 신문 〈한겨레〉와 잡지 〈한겨레21〉하고 〈씨네21〉에, 제 얼굴(신문 돌리는 모습)이 박힌 캠페인 광고가 여러 달에 걸쳐서 실렸고, 언젠가 〈한겨레〉 경영진 한 분한테, 최종규 씨가 바라면 특채로 〈한겨레〉 기자로 뽑아 준다는 귀띔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때 저는 대학교를 그만둔 몸이라 고졸 학력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신문방송사 가운데 오직 한 곳만 있는 ‘학력제한 없는’ 곳이었지만, 속내를 보면 일류대 아닌 기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토익점수 제출’이 발목을 잡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 경영진 분한테, “저는 특채를 바라지 않습니다. 시험을 봐서 떳떳이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시험을 치고 싶어도 토익점수를 내라고 해서 못 보겠습니다. 영어 솜씨를 알고 싶으면 영어로 글쓰기를 시키거나 영어로 면접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고, 경영진 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고 해서,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한겨레〉 기자는 될 수 없겠네요.”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러고 여러 해 지나, 서울을 떠나서 충주에서 이오덕 선생님 유고를 갈무리하는 일을 맡다가,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불법으로 몰래 펴낸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말썽을 풀려고 이오덕 선생님 유족과 권정생 선생님 사이를 오가면서 출판사 앞으로 보낼 편지 문건을 쓰고 있었고, 밑글을 쓰면서 제 인터넷방에 고치는 과정에 있는 글을 살짝 걸쳐놓았는데, 그만 이 밑글을 〈한겨레〉 기자가 말도 없이 훔쳐서 쓰면서 ‘특종’이랍시고 기사로 큼직하게 띄운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기사 도둑질 때문에 이오덕 선생님 유족과 권정생 선생님 사이에, 또 말썽을 일으킨 출판사 한길사 사이에서 진땀을 빼야 했던 일은 앞으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있기 앞서 몇 달 앞서까지 저는 〈한겨레〉에 “함초롬한 우리 말”이라는 이름으로 이태 반에 걸쳐서 연재기사를 올린 적이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한겨레 필진’인 제가 쓴 글을 아무 말이나 허락도 없이 훔쳐서 특종이랍시고 터뜨리는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한겨레〉 문화부 기자들이 저지를 줄을 누가 알았을는지요. 이에 항의를 했지만 아무 대꾸도 뉘우침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뒤로 몇 차례 제 글 도둑질이 이어졌는데, 쓰디쓰게 혼자서 웃을 뿐, 이런 사람들하고는 앞으로 마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 기사 도둑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당신들로서는 ‘우리 세상에 좋은 일을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신다면. 이리하여, 신문 〈한겨레〉를 읽는 사람들한테 도움되는 이야기를 건네준다면.

 

 그렇다면, 신문 〈한겨레〉에 날마다 실리는 주식시세표는 누구한테 도움이 되는 정보일까요. 수천만 원에 이르는 새차 소식은, 겨울철 스키장 소식은, 여름철 비행기 타고 멀리멀리 떠나는 나라밖 나들이 소식은, 수십만 원이 넘는 새 손전화기 소식은, 골프채와 비싼 물건 광고들은 …… 참말 누구한테 이바지할 소식일는지 궁금합니다. 신문 〈한겨레〉가 다루는 경제 이야기라면 어떤 경제 이야기가 되어야 할까요. 신문 〈한겨레〉가 다룰 문화 이야기라면 어떤 사람들이 누리거나 즐길 문화 이야기가 되어야 할까요.

 

 어느새 신문 〈한겨레〉가 스무 살이 되었다고 하는데, 스무 해라는 세월을 버틴 대목은 놀랍지만, 버티기만 할 노릇이 아니라, 아름답게 자라야 하지 않을까 묻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자랄 수 없는 신문이라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스스로 ‘문을 닫고’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묻고 싶습니다.

 

 서채원, 김달수, 이철, 강재언, 이진희, 위양복, 사토 노부유키 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펴내던 《계간 삼천리》는 1호부터 50호까지 곧은 흐름을 잃지 않고 펴냈는데, 더 호수를 이을 수 있었음에도 굳이 50호를 마지막으로 해서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 뒤 새로운 잡지를 다시 펴내어 50호로 또다시 마감을 했다지만, 또 신문과 잡지는 다르지만, 글을 쓰고 글을 다루고 글을 읽히는 넋과 얼은 매한가지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글이 엮이어 신문이 되고 잡지가 됩니다. 글이 여미어져서 신문 독자가 생기고 잡지 독자가 생깁니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계간 삼천리》가 힘겨우면서도 다부지게 걸어갔던 길을, 한국 사회에서 신문 〈한겨레〉는 얼마나 힘겹다고 하더라도 다부지게 걷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신문 〈한겨레〉는 이 땅 이 나라에서 다부지게 걸어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신문 〈한겨레〉는 조중동처럼 200만 부 넘게 찍어야 할 까닭이 따로 없는 한편, 조중동 기자만큼 일삯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출근하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얻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집안일과 아이 돌보기는 마누라한테 떠넘기고 바깥에서 술 마시고 유흥업소에서 아가씨 끼고 노는 기자로 살아야 합니까?

 

 신문 〈한겨레〉는 좌파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신문이면서, 어이없게도 좌파 신문인 듯한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참 안쓰러운 노릇입니다. 그러나 정작 신문 〈한겨레〉 속내인 우파 목소리라도 제대로 내느냐 하면, 아니올시다 하는 생각만 듭니다.

 

 재벌 삼성하고 사이가 틀어져서 삼성 광고를 못 받아서 삼성하고 손을 다시 못 잡게 되는 일은 슬플 수 있고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 〈한겨레〉가 먼저 삼성 광고를 끊지 못한 대목은 그지없이 안타깝습니다. 또한, 신문 〈한겨레〉가 재벌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꾸준히 실으면서도, 광고는 아무 말썽이 없이 받을 수 있게끔 영업이나 독자관리를 하면서 ‘삼성에서 광고관리 하는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도록 신문으로 말하지 못한 대목’을 읽어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비판이란 무엇이며, 비판은 어떤 마음으로 할 때가 참다울는지를 신문 〈한겨레〉는 얼마만큼 곱씹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더 깊이 헤아릴 대목을 대충 지나쳤기 때문에 오늘날 〈한겨레〉는 끝도 없는 위기가 꼬리를 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신문 〈한겨레〉를 좋아할 분도 있고, 안 좋아할 분도 있으며, 거들떠보지 않을 분이 있는 한편, 일찌감치 등돌린 분도 있을 텐데, 구태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길게 주절주절 떠들어 봅니다. 저 또한 〈한겨레〉를 안 보는 사람이지만, 지난 한때 〈한겨레〉가 위기라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밑바닥에서 애썼던 사람이었기에, 이렇게나마 한 마디 끄적거리지 않고서는 속이 답답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그저 푸념 몇 마디라고 귀엽게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로서는 〈한겨레〉라는 신문이 걸어가는 길을 보면서 여러모로 많이 배웁니다. 안타깝게도 ‘일그러진 거울’이나 ‘깨진 거울’이 되어 주면서, 한 사람이 그릇된 길로 접어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안타까움을 그득그득 느끼게 해 줍니다. (4341.12.1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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