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
사람들이 골목길을 찾아와서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저도 골목길 사진을 찍지만, 저는 ‘골목에 깃든 집에 살면서 내 삶터를 찍는 사람’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로 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은 ‘골목길에 안 살면서 골목길을 사진 작품으로 담아내는 사람’이곤 합니다. 어릴 적에 골목집에서 살아 본 적이 있는 분이 있으나, 골목길이라는 데를 처음 거닐고 처음 찍어 보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이제는 헌책방에서 사진을 찍거나 헌책방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예전에 헌책방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헌책방 여러 곳을 꾸준히 찾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거의 처음으로 찾아와 본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아 본 사람’이기 일쑤였습니다.
.. “투시는 단부사(귀여운)한 좋은 아이예요. 귀엽고 얌전하고.” “저보다 키가 큰 오빠에게 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보시오, 뺨이 붉은순나무 열매처럼 빨개졌소.” 투시가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앉았을 때 어머니는 생각했다. (할머니께서 보기 좋게 앉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이 아이는 마치 갈색 꽃잎이 펴진 것처럼 치맛자락을 잘 여미고 앉는구나.) .. (21쪽)
지난날,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아낸 사람들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낯을 찌푸리기 일쑤였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습니다. 헌책방을 즐겨찾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진 찍는 사람도 제법 있는데, 이분들은 어인 일인지 그렇게 즐겨찾는 헌책방에서 사진 찍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궁금함은 오래지 않아 풀렸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헌책방에 가면 책 보느라 바쁘지, 사진 찍을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니, 언제 이렇게 사진을 다 찍었어요?’ 하는 책손님들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헌책방 찍은 사진이나, 단골 아저씨 찍은 사진을 선물 삼아서 가끔 뽑아서 드리는데,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은 헌책방에서 책 보는 데에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어느 틈을 내어 이런 사진을 다 찍었을까?’ 하고 물으셨구나 싶더군요.
.. “(팔찌를) 끼면 좋을 텐데.” “아니야, 끼는 건 싫어!” “어째서 싫지? 너희 둘은 진흙으로 단단히 바른 집에서 언제까지나 함께 살기로 되어 있었는데…….” 투시는 마치 이시보다 훨씬 나이 많은, 그의 어머니처럼, 아니 할머니처럼 철들고 지혜에 가득 찬 눈길로 사촌오빠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노인네들의 꿈이야. 내 꿈은 그것과는 다르고, 이 헛된 세계와도 아무 상관이 없어. 우리는 영웅도 아니거니와 신들도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세상이 시작되던 때와는 달라. 우리는 텅 빈 이 세상을 메꿔 줄 만한, 사루도를 해치울 만한 사람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슈와, 슈와(그야 그렇지). 흰 조가비 아가씨! 그런데 네 꿈은 어떤 꿈이지?” “여자의 꿈이지 뭐.” “남자에게 말하면 안 되나?” “안 되지는 않아. 얘기할께요. 오빠가 나에게 ‘흰 조가비 아까시’라는 이름을 주었고, 내 꿈도 ‘흰 꿈’이니까요.” 따뜻한 봄햇살이 쏟아지는 토끼풀 위에 앉아서 투시는 이야기했다 .. (142쪽)
사진찍기란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자기가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없다고. 자기가 그지없이 아끼는 대상이 아니라면 사진에 담을 수 없다고. 자기가 오래도록 몸담고 같이 살지 않고서는 속내를 읽어내는 사진을 얻을 수 없다고. ‘꾸준히’라는 말로만은 안 되고, ‘늘 같이 언제까지나’가 되어야 비로소 ‘사진이구나’ 하고 느낄 만한 작품이 저절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사이 제가 사는 동네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오는 분들 작품이 영 내키지 않던 까닭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갑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 이름을 내세울 작품’을 넘는 사진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가 찍는 사람이나 대상을 더 깊이 사랑하는’ 사진으로 뻗어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분들로서는 ‘자기가 발디딘 땅’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함께하는 사진이 아니라, ‘여태껏 겪거나 보지 못한 낯선 모습이 재미있거나 놀라워서’ 그냥 한 번 찍어 본 사진이었습니다.
.. “그렇지. 작은 흰 조가비 아가씨. 우리는 마지막 야히 족이야.” 외사촌 남매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벙긋 웃었다. (나이로 보면 투시는 이미 젊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여동생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사랑스럽다. 투시의 뺨은 지금도 붉은순나무 열매처럼 붉다. 머리카락은 길고 반지르르 윤이 흐른다. 전에 할머니가 둘둘 감아서 빗어올렸던 것처럼. 투시는 야히 족 여자답게 의젓하고 반듯한 자세로 가볍게 걷는다. 지금도 투시는 메추라기 소리처럼 정겹게 시가가 시가가 하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가 워누포에서 나갈 때면 투시도 언제나 나를 따라온다. 내가 사냥할 때 투시는 언덕 너머에서 여자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함께 도토리며 땔나무를 모은다. 어디로 가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날마다 함께 계획을 세운다. 투시는 날마다의 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채워 준다.) 투시는 투시대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내 사촌오빠 와나시는 야히 족의 사냥꾼 관습에 따라서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머리 위에 감아올려 묶었던 그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겨우 뛸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이 오빠 뒤를 따라 어디든지 갔었지. 이 와나시가 부르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내 나날은 이 와나시가 채워 준다. 요즈음에는 ‘흰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 (167∼168쪽)
어제 서울 나들이를 자전거로 하면서, 용산역부터 종로거리와 서대문을 돌고 용산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시청 앞 너른터는 일찌감치 빽빽이 들어선 전경차들이 빙 두르고 있더군요. 한 겹으로 둘렀는데 이로도 모자라는지 더 두르려 하고, 길을 걷는 사람 모두를 막아섭니다. 시청 앞 너른터로 가는 사람이 아닌 데에도, 촛불모임을 하는 사람이 아닌 데에도 못 가게 막아섭니다. 전경들은 사람들한테 아무런 대꾸도 않습니다. 그저 모두한테 길을 막을 뿐입니다. ‘군인정신’일까요. ‘시키니까 따를 뿐’일까요. 군인한테 웃사람은 누구일까요. 분대장이나 소대장이나 중대장일까요, 군인이라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일까요.
.. (슈(물론), 나는 투시를 위해 팔찌를 만들 수는 없지. 투시는 진짜 내 누이동생과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투시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의 친구. 내 단부사 아가씨지!) .. (181쪽)
종로3가에서 볼일을 마친 다음, 독립문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렀다가 용산으로 가는 동안,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달렸습니다. 숙대입구역부터 용산역 앞까지는 거의 꼼짝도 못하는 자동차들입니다. 저는 평균빠르기 20킬로미터 안팎으로 자전거를 내처 달립니다. 자전거가 훨씬 빠를밖에 없지만, 걷는 사람이 버스나 자가용 탄 사람보다도 훨씬 빠르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굳이 이렇게 막히는 서울 시내에서 자가용을 버리지 않습니다. 좀 멀리 가는 분은 어쩔 수 없을 터이나, 버스도 버리고 두 다리로 걸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울 시내는 걷기에도 그다지 안 좋다고 하지만, 걷기에 안 좋다고 해도 자꾸 안 걸으려고 하니까 더 나빠진다고 느낍니다. 자전거 타고 다니기에 나쁜 찻길이라고 해도 자꾸자꾸 자전거를 타고 움직여 주고, 또 ‘발바리’ 같은 자전거 행사를 꾸준히 하면서 우리 스스로 느껴야 비로소 ‘자전거로 다닐 터전’이 나아집니다.
.. (투시의 낮은 ‘풀숲의 속삭임’을 듣고 싶다.) 이시는 간절히 그렇게 생각했다. 마리와르가 한순간, 언뜻 투시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시는 풀숲 속을 걸어가는 자기의 바로 뒤에서 소리도 없이 따라오는 투시의 기척을 애타게 느끼고 싶었다. 잠깐 뒤돌아보았을 때 투시의 웃는 얼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간절하게 생각했다 .. (267쪽)
촛불모임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뜻 또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촛불모임에 나와서 외치는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이렇게 애쓰고 스스로 삶을 바꾸고 생각을 고치며 매무새를 조금씩 야무지게 다스리는 동안 자기부터 거듭납니다. 자기부터 거듭날 때 자기 삶이 거듭나고, 자기 삶이 거듭나면 자기와 이웃한 사람들한테 좋게 영향을 끼쳐서 서로서로 거듭납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니까 몸에 좋은 밥을 찾아서 먹어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니까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애써서 찾아 읽어요.
(4) 죽음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우리들 사랑은 ‘우리 자신’도 아니요, ‘우리 삶터’도 아니요, ‘우리 삶’도 아닌 쪽으로 흐른다고 느낍니다. 자꾸만 ‘돈 사랑’으로 흐른다고 느낍니다.
.. 할아버지는, 앓지는 않았지만 그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이미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마디마디가 아파도 그러한 아픔을 없애 줄 만한 쿠이(의사)는 없었다 …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워누포로 오는 여행은 내 마지막 여행이었다. 다시 여행을 하기에는 나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어.” 여름의 심한 더위가 골짜기를 덮치기 전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그다지 울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가 버린 뒤로는 아침마다 더욱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공기가 하루하루 무거워지는구나. 나는 이제 공기를 입까지 들어올릴 기운도 없는 것 같다. 용한 쿠이가 있어 가벼운 공기를 불어넣어 주면 좋겠다.” … 바구니에 차를 담아 들여온 어머니 얼굴에서 눈물 자국을 보고 할머니는 옛날처럼 그 머리에 손을 놓고 말했다. “우리 ‘조상들’ 때문에 우는 걸 그만두어라, 내 딸아. 내가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사람은 이제 너도 아니고 투시도 아니지. 나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가 버린 할아범이야.” .. (160∼161쪽)
돈은 있어야 할 테지요. 돈은 벌어야 할 테지요. 그런데 무엇을 하는 돈인가 생각해 보았습니까. 어디에 쓸 돈인가 헤아려 보았습니까.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쓸 돈인가 살펴보셨습니까.
자동차를 몰아야 할 돈입니까. 집을 사야 하는 돈입니까. 새 손전화를 사야 하는 돈입니까.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떠나야 하는 돈입니까. 사랑이한테 선물을 사 주어야 하는 돈입니까. 땅투기를 해야 하는 돈입니까. 멋스럽게 보일 옷을 살 돈입니까.
기름값이 끝없이 치솟는 데에도 자동차를 굳이 몰아야 한다면, 또 값이 수백만 원부터 수천만 수억까지 하는 자동차를 굳이 사야 한다면, 그러면서 보험값 내고 뭐 치르고 해야 한다면, 돈이 꽤 많이 들겠지요. 집을 사야 한다면, 그런데 이 집도 서울 강남에 있는 아파트여야 한다면, 넓이도 좀 되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십 억으로도 모자랄 테지요. 전화 걸고 문자 보내고 하는 쓰임새가 아니라 이 기능 저 기능 달린 수십만 원짜리 새 기계를 쓰고 싶어도 돈은 참 많이 듭니다. 멀리멀리 오래오래 나들이를 하고프니 돈이 퍽 들겠네요. 선물을 손수 안 만들고 백화점 같은 데에서 돈으로 사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겠어요. 그리고 …….
.. 어머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우리가 워누포의 할머니 할아버지군요.” … 큰아버지는 그 지팡이를 쓰는 자신을 ‘늙다리 네발짐승’이니 ‘오소리’니 하고 불렀다. “할머니가 곧잘 그랬는데, 내게도 공기가 무거워졌구나.” .. (173쪽)
돈을 사랑하는 분들은, 언뜻 보기에 ‘사랑’ 같지만, 속을 보면 사랑이 아닌 ‘죽음’이라고 느껴집니다. 살려고 버는 돈이 아니라 죽으려고 버는 돈 같습니다. 즐겁게 살고자 찾는 일자리가 아니라, 자기 삶을 망가뜨리며 빨리빨리 늙어버리려는 일자리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삶을 아름답게 여미지 못할 뿐더러, 그 돈푼조각으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벌어도 벌어도 모자라고, 써도 써도 시원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쓸 만큼 벌면 되는데, ‘쓸 만큼’이 어느 만큼인지 헤아리고들 있는가요. 가질 만큼 벌면 되는데, ‘가질 만큼’이 어디까지인지 느끼고 있는가요.
더 많은 책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에 새로 나오는 책을 자꾸자꾸 읽어야 하겠어요? 아니지요. 읽으니 좋아서 자꾸 읽는 책이지요. 자꾸자꾸 벌어야 하는 돈은 무슨 뜻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벌어야 하는지요? 살려고, 즐겁게 살려고, 다 함께 살려고, 아름답게 살려고 버는 돈이 맞습니까.
.. “오늘은 강 건너에 가지 않느냐? 이제 곧 어둡겠구나.” 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 않겠어요. 가 봐야 찾지 못할 텐데요.” 어머니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없는 거겠지, 와나시. 그렇지 않다면 벌써 찾아냈을 테니까.” 이시가 옆으로 다가가자 어머니는 두 팔로 아들을 감싸안았다. 어머니와 아들은 얼싸안고 울었다. 여러 달 동안, 참고 참아 온 쓸쓸함과 슬픔이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허물어져, 그들은 목놓아 울었다. 눈물 속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리하여 둘은 큰아버지에 대해, 투시에 대해, 또다시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다만 이름은 말하지 않고 ‘없어진 사람들’이라고만 했다 .. (200쪽)
누구나 한 번 태어났으니, 한 번 죽습니다. 삶과 매한가지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때, 자기한테 가장 좋으며 걸맞으며 마땅한 길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삶이 즐거워야 죽음이 즐겁고, 죽음을 넉넉히 받아들여야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까를 짚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이 일흔 여든 아흔이 되어도 ‘난 안 죽어’ 하고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삶다울 수 없어요. 백 살에 죽을 수 있고 일흔 살에 죽을 수 있으며 쉰 살에 죽을 수 있는 한편, 서른이 못 되어 죽을 수 있습니다. 열다섯에도 죽고 일곱에도 죽습니다. 죽음이란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죽음이기 때문에, ‘나는 바로 오늘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니 언제라도 ‘내 마지막 날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삶을 추스르기 마련입니다. 언제라도 떠날 생각으로 허튼 아쉬움이나 궂긴 욕심이 아닌, 지금 내 삶을 가장 알뜰하게 돌보며 북돋울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마련입니다. 언제라도 물러날 수 있기에 나 혼자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달으면서, 나한테 한 조각 있는 콩마저도 반으로 갈라서 이웃하고 나눕니다.
..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지는 않았지만 아궁이의 불이 눈둑에 반사되어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을 감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입술은 야히 족 여자답게 꼭 다물고 배시시 웃음짓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한 손을 뺨에 살짝 댄 채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그 손목에 어머니가 언제나 보물꾸러미 속에 소중하게 넣어 두는 낡아빠진 그 향모 팔찌가 끼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잠이었다. 사랑하는 아들 테헤나 이시에게 아무도 모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어머니는 이시의 아버지에게로 길을 떠난 것이었다 .. (202쪽)
돈을 내쳐야 하는 삶이 아니라, 돈에 매이는 마음을 내쳐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끌어들이는 삶이 아니라, 돈이 고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다스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돈에 밴 손때와 피땀을 돌아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돈을 으뜸으로 삼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우리들이 손가락질하던 독재자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돈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내 삶을 잃고 내 이웃을 잃고 내 동무와 살붙이 모두를 잃고 외돌토리가 됩니다. 돈에 넋이 나가는 삶이 되어 버린다면,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건 전쟁무기 만드는 과학기술을 키우건 전쟁무기 손에 들고 나라를 지킨다는 군인으로 일하건, 모두 다 똑같은 학살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