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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 그늘 자리 - 자연이 예술을 품다
이태수 글.그림 / 고인돌 / 2008년 5월
평점 :
이 책 하나 55 ― 사람도 자연, 자연은 그대로 예술
: 이태수 글ㆍ그림, 《자연이 예술을 품다, 숲속 그늘 자리》
- 책이름 : 자연이 예술을 품다, 숲속 그늘 자리
- 글ㆍ그림 : 이태수
- 펴낸곳 : 고인돌(2008.5.25.)
- 책값 : 14800원
(1) 우리 집 옥상마당
수요일 저녁, 우리 동네에서는 밥찌꺼기를 내놓는 날입니다. 골목마다 밥찌꺼기 모아 가는 통이 놓이고, 저녁 일곱 시 뒤부터 한 집 두 집 바깥으로 밥찌꺼기를 내다 버립니다.
밥찌꺼기통은 닫혀 있기도 하지만 열려 있기도 합니다. 옆지기와 밤마실을 하면서 지나가다 보니, 뚜껑 열린 밥찌꺼기통에 머리를 박고 끼니를 채우는 길고양이가 여럿 보입니다. 몇 미터 거리가 되니 고양이가 퍼뜩 놀라며, 먹던 고개를 꺼내어 탈탈탈 걸어서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 밑으로 숨거나 우리와 멀찌감치 떨어집니다. 밤나절은 고양이가 느긋하게 저녁 먹는 때이니 발걸음을 좀더 죽여야겠군요.
[고깔제비꽃] .. 새로 돋아나는 이파리가 고깔을 닮아 붙여진 이름, 고깔제비꽃. 씀바귀를 고채(苦菜)라 부르고 민들레를 포공영(蒲公英)이라고 하면 참 알아듣기 힘이 듭니다 .. (12쪽)
우리 집에서 밥찌꺼기 나올 일은 거의 없지만, 어쩌다가 바나나라도 사먹으면 껍데기가 나옵니다. 양파껍질은 그물주머니에 고이 모으고, 감자며 무며 껍질째 먹으니, 남아서 버려지는 찌꺼기가 없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집에서 나온 밥찌꺼기는 1킬로그램이 채 안 되지 싶습니다. 두 식구가 먹기에 너무 많은 김치를 선물로 받아서 먹다 먹다 지쳐서 버려진 김치를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이런 몇 가지 밥찌꺼기를 옥상마당에 내어놓고 비를 맞히고 햇볕에 말리니 물기 소금기 쏘옥 빠지며 바삭바삭 부스러지며 가벼워집니다. 이제 흙하고 섞으면 모자라나마 거름으로 삼을 수 있을는지.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노라면, 동네에 사는 참새와 까치와 비둘기가 우리 집 옥상마당에 내려앉곤 합니다. 밥찌꺼기 같지도 않은 밥찌꺼기가 조금 나와 있어서 그럴 텐데, 몇 번 부리로 찍어 보더니 ‘영, 시원찮군!’ 하며 다시 포르르 날아가곤 합니다. 지금도 참새 한 마리가 부지런히 뭔가를 쪼고 있는데, 따로 새모이라도 놓을까 싶기도 합니다. 옆지기는 밤나절, 고양이밥을 조금 마련해서 길모퉁이에 놓으면 어떻겠느냐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참개구리] .. 집 뒤에 논이 있었습니다. 오월이면 개구리 소리 즐거웠습니다. 지금은 작은 물웅덩이 하나 남기지 않은 채 개구리 삶터를 갈아엎고 사람 집을 지었습니다 .. (32쪽)
지난해에 옆지기가 데려온 길고양이 열 마리는, 모두 우리 집 옥상마당에서 나가서 인천바닥 어딘가에서 잘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드물게 만나곤 하는데, 우리 얼굴을 떠올리는지 잊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한 마리, 지난주에 한 마리, 또다시 ‘귀염둥이 짐승으로 집에서 기르다가 버려진 고양이’ 두 마리를 우리가 맡게 되었습니다. 맡는다기보다 옆에서 먹이와 물을 주면서, 무럭무럭 자라 스스로 동네를 누비며 길을 익힐 때까지만 함께 지낼 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두 녀석 모두 처음 우리 집으로 왔을 때 바들바들 떨면서 구석에 숨은 채 나올 줄을 몰랐습니다. 어린 녀석들이지만, 몸으로는 ‘어미 품도 모르면서 이곳저곳에서 떠돌다가 버려지기만 하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미 품에서도 떠나야 했지만, 형제도 없고 동무도 없이 외딴 집안에서 집임자하고 살아가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자기와 함께 살아갈 집임자가 ‘싫다’면서 내보내게 되었으니, 이런 느낌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녀석들은 하루이틀 지나면서, 사흘나흘 흐르면서, 차츰 우리 집에 익숙해지고 우리 두 사람 얼굴과 목소리에 길이 듭니다. 이제 두 녀석 모두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까지 아양을 떨 만큼 되었습니다. 고양이 바탕은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이 홀로 길을 간다는데, 먼저 온 녀석은 앞으로도 우리 집에 머물 듯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녀석들 풀어 놓은 옥상마당을 슬며시 내다보니, 큰 녀석은 종이상자집에 들어가 알쏭달쏭한 모습으로 단잠에 빠져 있고, 작은 녀석은 쓰레받이며 노끈이며 낡은 바구니며, 옥상마당에 그대로 둔 물건들을 노리개 삼아서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뒹굴면서 놉니다.
[늑대거미] .. 물 위를, 물풀 위를 징검징검 걸어다니면서 벼멸구를 잡아먹는 늑대거미. 살아 있는 농약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은 사람이 끼어들지 않으면 서로 먹고 먹히면서, 서로 도우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스스로 숨쉬며 살아갑니다 .. (42쪽)
(2) 골목꽃과 이름
몇 해 앞서까지만 해도, 꽃이랑 나랑은 아무 끈이 이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지내 왔습니다. 책만 보며 살았고, 책방만 다니면서 살았으며, 자전거로 싱싱 달리기만 했습니다. 더 빠른 길을 찾아내어 달리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자동차와 내기 달리기라도 하듯 용을 써 왔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해 산골자락에서 지내면서 달따라 피어나는 꽃을 보고 나무를 보는 동안, 마음이 차츰차츰 바뀌었습니다. 꽃이나 나무나 풀을 살뜰히 담아낸 그림이 담긴 책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두 눈으로 꽃이나 나무나 풀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움직임에는 소홀했습니다. 산골자락 삶 여러 해는, 제 어수룩함이 무엇인가를 넌지시 짚어 주었고,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다는 놀라움과 고마움을 느끼면서 자연 삶터로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제, 산골자락에서 떠나 도시 한켠으로 들어온 몸이 되면서, 산골자락에서 꽃과 나무와 풀을 느끼듯, 골목길을 다니면서 온갖 꽃과 나무와 풀을 보고 있습니다. 이름을 아는 꽃과 나무와 풀이 있으나, 이름을 모르면서 바라보고 쓰다듬고 냄새를 맡는 꽃과 나무와 풀이 있습니다.
[봉숭아] .. 흙이 아스팔트로, 시멘트로 덮이고 손톱이 매니큐어에 덮인 지금 붉은 봉숭아물 들이고 여름, 가을 가고 겨울 손톱 끝에 매달린 초승달 사랑을 가슴 졸여 기다리는 .. (52쪽)
길을 거닐다가 몇 차례,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한테 여쭈었습니다. “아주머니, 이 노랗고 예쁜 꽃은 이름이 어떻게 되어요?” “할머니, 이 소담스러운 꽃은 이름이 무엇인가요?” 딱 한 번, 꽤나 긴 서양이름이 붙은 꽃이름을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한 말씨로 줄줄줄 꽃이름을 대는데, 저와 옆지기는 못 알아듣습니다. 속으로, ‘그래, 꽃이름은 몰라도 꽃을 예쁘게 느낄 수 있으면 되지 않아’ 하고 생각했습니다.
꽃이름을 모른다고 하는 다른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예쁘니까 심었지 뭐” 하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당신들도 골목골목 찬찬히 거닐며 저잣거리를 오가는 동안 눈여겨보았던 꽃이 지고 씨를 맺으면, 씨 조금 얻어서 헌 꽃그릇을 마련하고 흙을 어디선가 퍼 오고 거름을 내고 힘을 북돋운 다음 씨앗을 고이 심어서 어여쁜 꽃을 길러내셨지 싶습니다.
[강도래 애벌레] .. 사람이 오고 간 발자국이 많을수록 사람이 남기고 간 자국이 많을수록 맑은 물은 흐려지고 맑은 물에서 사는 작은 생명들은 살 곳을 잃어 갑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도 놀 곳을 살 곳을 잃어 갑니다 .. (74쪽)
사람마다 이름이 있고 꽃마다 이름이 있으며 짐승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꽃과 나무와 풀에, 또 짐승들한테 이름을 붙여 주는데, 꽃과 나무와 풀도 우리 사람을 보면서 ‘저건 뭐다’ 하면서 이름을 붙이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짐승한테 이름을 붙이며 부르듯이, 짐승도 우리 사람을 보면서 ‘너는 뭐다’ 하고 이름을 붙이며 머리속에 새기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 집 고양이 조금 큰 녀석은 ‘후추’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전 임자가 붙인 이름으로, 털빛이 후추 빛깔이라 해서 붙였답니다. 지난주에 들인 어린 녀석은 ‘애깽’이라고 하다가 ‘밤톨’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기 고양이라고 해서 ‘애깽’으로 했고, 아직 밤톨 만한 크기이기도 하지만, 털빛이 밤톨 빛깔이라는 느낌이라서 ‘밤톨’이라고 했습니다.
[조릿대] .. 응달에서 잘 자라고 추위에 잘 견디는 조릿대 이파리는 겨울철 먹이가 모자라는 산양에게 겨울을 이겨 내는 먹이가 됩니다 .. (92쪽)
(3) 《숲속 그늘 자리》라고 하는 그림이야기
《보리 아기 그림책》부터 《심심한 오소리》까지, 자연 삶터와 목숨붙이를 찬찬한 그림으로 담아 온 이태수 님이 《숲속 그늘 자리》라고 하는 그림이야기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그림 하나에 이야기 하나를 붙인 짜임새입니다. 그림 하나에 붙인 이야기 하나는 시라고 느낄 수 있고, 짤막한 생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읽어내기 나름입니다.
[비오리] .. 물이 맑고 물 흐름이 빨라서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 동강은 비오리, 수달, 논병아리, 어름치 ……. 수많은 생명을 품고 흐르고 또 흐릅니다 .. (102쪽)
이태수 님은, 책 머리말에서 “이 책에 실린 생명들은 아주 귀한 것보다는 살아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많고, 몇몇 생명은 조금만 힘을 들이면 만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자연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길을 걷거나, 산에 오르내리고, 바닷가를 걸으면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우리 삶터는 자연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 그림이야기책에 실린 목숨붙이들도 ‘너무 멀다’고 느낄지 모르는데, 도심지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면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 싱싱 내달리는 찻길가에서 자라는 나무 둘레 몇 뼘 안 되는 흙에서도 보고, 호젓한 골목길 한켠에서도 보며, 골목 안쪽에 손바닥 만하게 마련한 텃밭에서도 봅니다.
사람 아닌 목숨붙이도 자연이지만, 우리 사람 또한 자연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연이며, 우리 스스로도 자연을 이루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에, 우리 둘레에 고이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이웃 자연을 못 느끼거나 못 깨닫거나 못 보지 않느냐 싶어요. 이리하여, 내 이웃과 동무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자연’입니다만, 내 이웃도 ‘살가운 사람’이고 ‘아름다운 자연’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서로 밟고 올라서고 빼앗고 겨루려고만 복닥이는지 모를 일이에요.
[도롱이벌레] .. 집 모양이 도롱이를 닮은 도롱이벌레. 자기 삶터에서 가장 흔한 나뭇가지, 나뭇잎으로 집을 짓고 겨울을 납니다. 집이 무너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쓰레기를 남기지 않습니다 .. (108쪽)
나 혼자 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닐 때, 우리 몸에 깃든 자연이 시나브로 빛을 냅니다. 나와 이웃이 함께 흐뭇하기를 바라는 넋을 가꿀 때, 우리 마음에 잠자고 있던 자연이 살며시 깨어나 고운 냄새를 풍깁니다.
그늘을 드리워 뭇 목숨붙이가 뜨거운 햇살에 마르지 않도록 잎사귀를 벌리는 나무가 있습니다. 뜨거운 햇살일수록 더욱 맛난 밥으로 여겨 잎사귀를 더욱 벌리고 키를 한껏 높이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림이야기책 이름이 《자연이 예술을 품다, 숲속 그늘 자리》인데, 책을 덮으며 헤아려 보건대, “자연은 그대로 예술”이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연인 줄 모르고, 우리 이웃도 자연인 줄 깨닫지 못하는 한편, 우리를 둘러싼 너른 자연이 어떻게 예술이며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인지를 못 들여다보는구나 싶습니다. 글이 길게 실리지 않은 책이나, 띄어쓰기 틀린 대목이 열 군데가 넘어서 조금 아쉽습니다. (4341.6.26.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