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신문>에 싣는 글입니다. 이 글을 속으로 잘 삭이면서 받아들여 주실 분들이 꼭 한 분은 있으리라 믿으면서, 알라딘 서재에도 함께 걸쳐 놓습니다.






 
 엊저녁, 책상셈틀을 끄고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섭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서 책을 잠깐 구경하고 귤 세 알 얻어먹습니다. 이곳 인천 배다리를 가로지르는 ‘너비 50미터 길이 2.41킬로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종합건설본부장이 아침에 찾아와서는, ‘내년 초에 공사를 재개할 것입니다’ 하고 말하기에, 헌책방 아주머니께서 ‘여기는 인천이라고요,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곳이 아니라고요!’ 하고 외쳤답니다. 인천시 공무원과 개발업체 사람들은, 골목집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이곳을 책상머리에 앉아 길그림으로만 보면서, ‘시 재정에 도움이 안 되는 곳이라 시 재정에 도움이 될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올려세워야 한다’는 자기들 생각을 대놓고 지역신문에 말하고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나옵니다. 예닐곱 해 앞서까지만 해도 극장이 있던 터 옆으로 난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일제강점기 때 제국주의자들이 인천 항구를 거쳐 서울로 가던, 그리고 조선땅에서 빼앗은 물건을 일본으로 실어나를 때 지나다니던 쇠뿔고개길(우각로)을 걷습니다. 조금씩 살이 빠지는 보름달을 올려다봅니다. 차 다니는 길로 잠깐 나왔다가 손수레도 들어설 수 없는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창영동 골목길을 빠져나온 다음, 숭의동 달동네 골목길로 들어섭니다. 이달 첫머리, 숭의동 골목집 할배 할매가 감을 따던 나무 앞에 섭니다. 까치밥 네 알 남았습니다. 뚱뚱한 사람은 지나가기 힘들 비좁은 골목을 사뿐사뿐 빠져나가고, 꽤나 비알이 져서 고양이도 굴러떨어질지 모를 길을 지나갑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전철 굴다리 밑으로 나오니 야구장 앞. 예순 해 가까이 된 이 ‘숭의 야구장’을 2008년 1월에 허문다는 인천시장 지시사항을 들어 보면, 야구장을 허물고 축구전용구장을 짓는다는데, 여기에 쓰인다는 돈은 10조에 가깝습니다. 야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야구장 건너편에 있는 체육사로 찾아갑니다. 국민학교 적 동무가 장사를 하는 집. 어제 징허게 술을 퍼붓느라 오늘 아침 이불에서 벗어나기 싫었다는 녀석은 하루 내 갤갤대다가 이제 일 마치고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연말이면 죽어야 돼. 업체 사람들하고 주말마다 술 마셔야 하니까. 화요일까지 죽어 있다가 목요일에나 정신을 차려. 그나저나 너, 두꺼운 책 낸 거 있다며? 나중에 그것 좀 갖다 줘 봐라, 보게. 아니다, 내가 너네 집에 갈게.”

 찬바람 부는 골목으로 다시 나와서 걷습니다. 야구장 둘레에 있는 닭집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열네 살》이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맥주를 마시고, 옆지기는 《동 키호테의 탈출》이라는 프랑스 그림쟁이 데생책을 보면서 콜라를 마십니다. 여러모로 칭찬과 추천을 받는 책들이지만, 책방 나들이를 해서 두 손으로 집어들어 펼쳐 넘기며 우리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를 헤아리기 앞서까지는 참말로 읽을 만한지 그냥 지나쳐도 좋을 만한지 알 수 없던 책들을 안주 삼아서 술 한잔을 마십니다. (4340.11.29.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