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팔랑귀



  나를 처음 만나는 분들이 처음 터뜨리는 말은 낯설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지만, 지겹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정년퇴직 교수’라 하고 ‘이웃나라에서 오래 살기도 했다’는 어느 분이 끈질기게 묻는다. “틀림없이 부모 가운데 한 쪽이 외국사람 아니에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충청남도 예산과 당진 시골자락에서 태어나서 시골아이로 자라고서 인천으로 건너와서 젊은날을 보내며 아이 둘을 낳아서 돌보았고, 이제는 충청북도 음성으로 옮겨서 늘그막을 살아낸다. 어머니 쪽 할매할배도, 아버지 쪽 할매할배도, 그냥그냥 다 시골내기 논밭지기였고, 아버지 할배 쪽은 황해도 해주하고 오랜 줄이 닿는 줄 안다.


  1994년에 인천을 떠나 서울에 있는 한국외대 네덜란드말 학과에 들어가기 앞서도 나더러 “네덜란드사람 아니에요?” 하고 묻는 분이 제법 있었고, 어느 분은 “네덜란드사람 피가 흘러서 ‘엄마말’을 배우려고 하나 봐요?” 하는, 그야말로 뜬금없는 말을 자꾸자꾸 캐묻기까지 했다. 어느 날에는 “베트남사람 아니에요?”라든지 “일본 관광객인 줄 알았어요.”라든지 “일본에서도 오키나와 쪽이나 훗카이도 쪽 사람 아니었어요?”라든지 “미국사람 아니에요?”라든지 “덴마크사람인 줄 알았는데.”라든지 …… 열 살 무렵부터 쉰 살이 넘은 나이에 이르도록 ‘뿌리나라’가 어디인지 알쏭달쏭하다고 물어대는 분이 참으로 많다.


  문득 하나하나 짚자니, 나더러 뿌리나라가 어디냐고 묻는 분 가운데 ‘중국’을 꼽은 사람만 없고, 푸른별 웬만한 나라 이름을 다 들었다. 네팔이나 부탄이나 버마를 묻는 사람이 있었고, 페루나 아르헨티나나 에콰도르를 묻는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묻는 소리에 질려서 이따금 “제 피를 살피니 우리별 모든 나라에 한 분씩 다 있더군요.” 하고 대꾸한다. 아마 우리는 이 나라 이 땅 사람이기 앞서 ‘푸른별 모든 나라’에서 지난날 다 살아낸 발자취가 있을 만하다. 오늘은 ‘한나라(한국)’라는 몸을 입되, 누구나 지난날에는 ‘온나라(전세계)’ 곳곳에서 다 다른 삶과 살림과 사랑을 누렸다고 할 만하다고 본다.


  팔랑팔랑 나비를 지켜본다. 한가을 부산 한복판인데 새끼손톱만 한 부전나비가 발등을 스친다. 풀밭에 쪼그려앉는다. “넌 어느 나라 나비이니?” 하고 물어본다. 나비가 어처구니없다며 팔랑팔랑 날갯짓으로 휙 저기로 간다. 나도 빙그레 웃는다. 나는 나인걸. 나는 인천사람도 서울사람도 부산사람도 아니고, 전라사람도 고흥사람도 아니고 충청사람도 아니다. 그저 나는 나라는 사람이다. 나는 어느 한 곳을 뿌리나라로 삼을 마음이 아예 없다. 나는 나한테 스스로 새롭게 살라는 길을 찾으라고 책노래를 들려준다. 2025.10.13.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