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4.12.12.
숨은책 1000
《汎友에세이選 62 어느 누가 묻거든》
한승헌 글
범우사
1977.8.25.첫/1977.12.10.2벌
책은 돌고돕니다. 오늘 제가 읽은 책은 이튿날 아이 손으로 옮길 수 있고, 동무나 이웃 손으로 건널 수 있습니다. 어제 누가 읽은 책이 오늘 제 손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돌고도는 책인데, 돌고도는 이야기입니다. 말길을 처음 여는 이가 있고, 글길을 먼저 여미는 이가 있다면, 이 말글을 듣거나 읽는 이가 있어요. 혼자 속으로 움켜쥐거나 웅크리지 않기에 돌고도는 이야기입니다. 《汎友에세이選 62 어느 누가 묻거든》은 예전에 이미 읽었으나, 2024년 11월 17일에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을 찾아가서 책시렁을 한참 누비고서 이제 책값을 셈해야지 하던 때에 마지막으로 눈에 띄었습니다. 이미 읽었어도 새삼스레 꺼내어 펼치다가 속에 적힌 여러 사람 손글씨를 봅니다. “一九八五.八.土. 서울 뿌리書店.”이 있고, “바람부는 날. 꼬마 서점. 겨레 달음.”이 있군요. 서울 〈뿌리서점〉은 용산에 있는 헌책집입니다. 그러니까 1977∼78년 무렵 누가 먼저 새책으로 장만해서 읽은 뒤에 헌책집으로 나왔고, 헌책집에서는 1985년에 새로 손길을 탔으며, 이 책이 다시 헌책집으로 나왔고, 아마 1990년대 첫무렵에 세 사람째 책임자가 바뀐 셈인데, 2024년에 다시 저한테 왔으니, 어느덧 적어도 네 사람이 이 작은책을 쓰다듬는군요. 처음 책을 장만한 분이 손글씨를 남겼으면, 저까지 네 사람째 손빛이 흘렀을 텐데, 나중에 또 누가 저를 이어서 손수 이야기를 얹을 수 있습니다. 처음이 무엇이고 끝이 무엇이냐고 묻는 분이 있으면, 저는 늘 “끝이란 처음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짚으면서 “처음이란 끝을 노래하는 발걸음”이라고 보탭니다. ‘섣달’하고 ‘설날’은 ‘서(서다)’라는 낱말이 밑동입니다. ‘서다’는 ‘멈춰서다’라는 뜻하고 ‘일어서다’라는 뜻을 나란히 품어요. 모든 끝자리란 언제나 새자리로 나아가려고 가볍게 잠드는 꿈집이지 싶습니다. 고요히 잠들어 꿈을 그리는 씨앗은 새봄에 눈을 뜨고서 푸른빛으로 활짝 깨어나게 마련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