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2024.10.23.
숨은책 978
《소련과 중국, 그리고 잃어버린 동족들》
김은국 글·사진
을유문화사
1989.4.25.
글을 쓰려면 걸어야 합니다. 손잡이를 쥐고서 부릉부릉 내달릴 적에는 아무 글을 못 쓸 뿐 아니라, 둘레를 살펴야 하기에 글감을 생각할 수조차 없어요. 그림을 그리려면 거닐어야 합니다. 붓이 아닌 손잡이를 쥘 적에는 우리 곁에 누가 어떻게 깃들어서 살아가는가를 하나도 못 보고서 휙휙 지나칠 뿐입니다. 걷는 발걸음이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문득 멈춥니다. 걷는 발길이니까 모든 곳을 새롭게 돌아갈 수 있고, 한참 쪼그려앉아서 들꽃을 들여다볼 수 있고,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바라기를 누릴 만합니다. 누가 올레길이나 둘레길 같은 데를 같이 가자고 하면 아예 등돌렸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무 이름을 안 붙인 마을길을 거닐고 싶어요. 수수하게 어깨를 맞댄 작은 살림집이 나란한 골목길을 거닐 마음입니다. 마을길과 골목길을 사뿐사뿐 거닐다가 작은책집을 만나려는 뜻입니다. 《소련과 중국, 그리고 잃어버린 동족들》을 읽고서 〈연길고서점〉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2002년에 드디어 처음으로 중국 연길로 책마실을 떠날 수 있던 때에, 이 책에 깃든 빛꽃(사진)을 찍어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2002년에는 이미 〈연길고서점〉이 없다고 하더군요. 섭섭했지만 어쩔 길이 없습니다. 그만큼 중국한겨레가 책을 안 읽거나 멀리한다는 뜻이고, 이미 남녘으로 돈벌이를 하러 찾아오면서 ‘책을 왜 읽나?’ 하고 여긴다는 뜻이에요. ‘그래도 모르잖아?’ 하는 마음으로 연길시 안골을 홀로 조용히 찾아다니며 ‘숨은 헌책집’을 둘 보기는 했으나 모두 중국책만 팝니다. 이따금 길장사(노점상) 가운데 책보따리를 풀어놓는 분이 있어서 한참 두리번두리번했습니다. 빠른길(고속도로)이 늘수록 책하고 멀구나 싶어요. 하늘나루(공항)를 늘릴수록 책을 더 잊는 듯싶어요. 그저 이웃을 만나는 오솔길이 있을 적에 책을 손에 쥐리라 느껴요. 오솔길에는 나무가 우거지면서, 새도 다람쥐도 깃들 테니, 철마다 다른 노래를 베풀 테지요. 작은길을 잊기에 마음빛을 잊고, 거님길을 잃으며 아이들이 웁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