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4.9.30. 치료 치료 치료
일본사람은 한자말로 ‘치료·치유’를 한다고 하다가, 요사이는 ‘테라피’를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언저리부터 치료·치유를 한다고 여기는 말씨가 번지더니 요즈음은 테라피를 한다고 여긴다.
왜 치료사나 테라피스트일까? 달래고 다스리고 다독이고 돌보고 보살피고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가다듬고 풀어주고 토닥이고 씻어내던 손길은 어디로 갔을까?
자격증이 있어야 사랑을 하거나 짝을 맺거나 아기를 낳거나 아이를 돌볼 수 있는가? 전문가한테서 말씀을 들어야 몸을 고치거나 아이를 추스를 수 있는가? 언제부터 포근손과 따뜻손을 우리 스스로 버리거나 팽개쳤을까?
책읽기를 누가 가르치거나 이끌어야 줄거리를 알아본다면, 책을 왜 읽나? 그림책도 동화책도 인문책도 문학책도, 책을 손에 쥔 사람이 스스로 읽어내면서 스스로 느낌을 말할 때라야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림책 한 자락에 무슨 이야기가 깃들었는지 스스로 읽어내지 못 하거나, 캐릭터잔치에 동심천사주의에 치유를 다루는 그림책만 펴내고 읽히고 판다면, 왜 읽는 셈인가?
아이 곁에서 하루를 노래하고 함께 놀며 살림을 짓는 웃음꽃을 사랑씨로 심으면 될 책읽기일 뿐이다.
으리으리한 허울(명분·주제의식)이 넘친다면 책이 아니라 종이뭉치라고 느낀다. 우리는 자전거를 달릴 뿐이다. 좋은자전거나 고급자전거나 명품자전거나 수입자전거나 국산자전거를 달릴 까닭이 없다. 자전거를 달릴 뿐이다.
사진을 찍을 뿐이다. 디카나 필카 아닌 사진을 할 뿐이다.
붓(볼펜, 연필)을 쥐고서 글을 쓸 뿐이다. 국산연필이나 일본연필이나 프랑스연필이 아닌, 그저 연필을 쥐고서 글을 쓸 뿐이다.
그런데 어느새 이 나라 사람들은 ‘자동차’가 아니라 ‘좋은차’를 몰려고 한다. 밥이 아니라 맛집에 줄선다. 책이 아니라 베스트나 스테디나 인기작가나 유행이나 치유나 학습이나 ‘좋은책’에 사로잡히더니 스스로 옭매인다.
독서치료도 미술치료도 음악치료도 참 터무니없다. 그저 읽고 그리고 노래하기에 사람이고 삶이고 살림이고 숲이고 사랑이다.
치유사자격증이나 테라피수업은 모두 삶을 등지고 살림을 뭉개고 숲과 멀고 사랑을 모르더라. 무엇보다도 치유와 테라피에는 아이가 없고 어른이 없이, 그저 전문가와 수강생이 있더라.
어른이라면 아이한테 돈이나 높임말을 안 바란다. 아이라면 어른한테 수업이나 공부를 안 바란다. 어른이라면 아이한테 소꿉놀이를 온몸에 맨몸으로 언제 어디서나 즐길 틈을 스스럼없이 넉넉히 늘 내어준다. 아이라면 어른한테 사랑을 보여주고 이끌고 가르친다.
아이한테서는 안 배우면서 전문가나 치유사(테라피스트)한테서 외우듯 배우려 한다면 스스로 넋(영혼)을 죽이고 만다. 어른으로서 살림짓기를 등지거나 멀리하면서 숲을 모르기에 헤매고 자빠지고 쳇바퀴에 스스로 가둔다.
손길로 빚고 짓고 나누는 사람이기에 사랑으로 가는 숲빛이다. 손짓으로 노래하고 놀기에 무럭무럭 자라면서 아름답고 즐겁다. 이제 서울을 떠나서 시골로 보금자리로 마음자리로 돌아갈 때라고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