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쪽빛그림책 2
이세 히데코 지음, 김정화 옮김, 백순덕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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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 글ㆍ그림 : 이세 히데코
- 옮긴이 : 김정화
- 펴낸곳 : 청어람미디어(2007.9.10.)
- 책값 : 1만 원



― ‘버려진 책’이 가꾸어 준 내 삶
: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를 덮으면서


 

 〈1〉 내가 좋아하는 책


 지난 월요일, ‘신구문화사’ 손바닥책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의 전도자 6인》(1976)을 서울 돈암동 헌책방에서 찾았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찾고 있던 책을 이제야 만납니다. 진작 판이 끊어진 책이기 때문에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찾을 수 있을까요? 웬만한 책은 다 갖추었다는 국립중앙도서관에도 《기독교의 전도자 6인》은 없습니다.

 지난 화요일, 라디오 역사를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주는 《a pictorial history of RADIO》(Citadel press,1956)를 서울 홍제동 헌책방에서 보았습니다. 나라밖에서 라디오가 처음 만들어지고 방송이 퍼지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우리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만, 나라밖이든 나라안이든, 라디오라는 물건이 만들어지고 라디오 방송이 우리 삶으로 파고든 이야기를 살필 수 있는 책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교보문고에서 이런 책을 찾을 수 있을까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런 책이 있을까요.
 

― 아저씨가 만들어 주신 책은 두 번 다시 뜯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식물학 연구자가 되었다. (56쪽)


 지난달, 《토트 티아메르-청소년의 순결》(가톨릭출판사,1963)이라는 책을 서울 연세대 앞 헌책방에서 장만하여 읽고 있습니다. 책도 묵었고 줄거리도 묵었지만, 처음 나온 지 마흔 해가 지난 이즈막에 읽어도 고개를 끄덕거릴 대목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다산시선》을 읽어도, 《목민심서》를 읽어도 그렇습니다. 《북학의》나 《을병연행록》을 읽어도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브르 곤충기》뿐 아니라 《파브르 식물기》도, 시튼이 쓴 동물 이야기도 세월이 묵을수록 빛을 더해 간다고 느낍니다. 《수달 타카의 일생》이나 《모래 군의 열두 달》 또한 앞으로 쉰 해나 백 해가 지난다 하더라도 책상맡에 놓고 짬짬이 다시 돌아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소피의 나무들”. 책 제목을 새롭게 붙였네! 아카시아 그림은 표지로 다시 태어났고, 내 이름이 그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53쪽)


 지금은 책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저입니다. 책을 엮고 책을 쓰는 일을 하는 한편, 책을 가꾸고 지키는 도서관 일을 합니다. 전국 곳곳에 있는 헌책방을 하나둘 찾아다니면서 만나는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조차 없는 책이 제법 되고, 앞으로 세월이 좀더 지나면 ‘헌책방에서마저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책’도 꽤 되겠지요. 이런 책들을 돈 값어치로 셈한다면 ‘값나가느니 값 안 나가느니’ 할 수 있겠지만, 책을 장만할 때 돈이 들어간다뿐, 책을 읽을 때에는 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가 꾸리는 도서관에 와서 책을 구경하거나 읽는 분들한테도 돈이 들어가지 않겠지요.

 1979년 4월에 나온 잡지 《현존》 100호를 돈으로 따져야 할까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포토그라피》라는 사진잡지를, 《사진문화》라는 사진잡지를 돈셈으로 헤아려야 할까요. 종로서적이 무너지면서 함께 사라진 책들 가운데 하나인 《인권운동》이라는 조그마한 책을 값나가는 보기드문 책으로 쳐야 할까요. 삼성출판사에서 1970년대에 손바닥책으로 엮어낸 ‘한국문학전집’을 돈값에 따라 바라보아야 할까요.


― 책에는 귀중한 지식과 이야기와 인생과 역사가 빼곡히 들어 있단다. 이것들을 잊지 않도록 미래로 전해 주는 것이 바로 를리외르의 일이란다 ……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좋아. “얘야, 좋은 손을 갖도록 해라.” (45쪽)


 ‘우라느스키’라는 분이 쓴 《무신론자의 바이블》(정음문화사,1984)을 읽으니,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 병을 고치는 것도, 노후의 생활도 자기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해 나가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신체 장애자의 경우도, 힘껏 공부해서 가능한 한 자기의 힘으로 살아야 하리라. 사는 권리란, 자기 자신의 의사와 능력으로 사는 권리이며, 타인에게 의뢰하며 사는 권리가 아니다.(142쪽)”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읽다가, 문득 ‘우라느스키’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인터넷 찾아보기를 해 봅니다. 하지만 찾아볼 수 없습니다. 책에도 소개가 없고, 인터넷에서도 이이 발자취를 살필 수 없습니다.

 1960∼70년대에 우리 나라에 곧잘 소개된 ‘무샤고오지 사네아쓰’라는 일본 철학가 발자취 또한 인터넷 찾아보기로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1961년에 번역된 《젊은 날의 철학》(백문사)을 읽으면, “좋은 문학에 접하면 자기를 살리는 방법, 어떻게 하면 자기 완성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인간의 사는 목표를 볼 수 있게 된다.(29쪽)”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1961년에 이이 철학책 묶음이 손바닥책으로 여섯 권 나왔습니다만, 마흔 해 남짓 지난 오늘에 와서는 책은커녕 발자국조차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 “책이 이리 되도록 많이도 봤구나.  좋아, 어떻게든 해 보자꾸나.” “전 나무가 좋아요. 이 책엔 나무에 대한 건 뭐든 다 나와 있어요.” (24쪽)


 사람들이 저한테 “헌책방이 뭐 그리 좋아요?” 하고 묻거나 “헌책방에서 무슨 책을 볼 수 있나요?” 하고 묻거나 “헌책방에서 만난 보물이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면, 제 책상맡에 있는 책을 휘 둘러보다가 요즈막에 장만한 책을 집어서 보여줍니다. “지금은 비록 판이 끊어진 책이거나, 출판사가 문을 닫아서 사라진 책입니다만, 세월이 흘러도 우리한테 즐거움을 안겨 주는 책이에요. 오히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빛이 나는 책이에요. 세상흐름을 잽싸게 옮겨타며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얻으려 하지 않은 책이라면, 지금은 새책방 진열대에서 밀려나 자취를 감추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헌책방에서 다시 빛을 보기 마련이에요. 저는 헌책을 보거나 새책을 보지 않고 그냥 ‘책’만 보고 있어요. 헌책방에서는 베스트셀러니 스테디셀러니 하는 이름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책을 살필 수 있어 좋아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크게 칭찬을 하거나 북돋워 주네 하는 이름에 따라 책을 고르지 않을 수 있어 좋아요. 그 어느 평론가나 책소개꾼들도 알아채지 못한 책이라 하겠지요. 누구보다도 샛장수 아저씨들이 고물상에서 건져낸 책이고, 헌책방 일꾼이 솎아낸 책이에요.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그래서 헌책방 일꾼은 허파가 안 좋답니다. 어쨌든, 이분들은 책에 담긴 줄거리는 모르실 수 있으나, 누군가한테 꼭 쓸모가 있구나 느껴서 하나둘 그러모은답니다. 저는 이렇게 솎여진 책에서 제 삶을 가꿀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책을 가만히 살피면서 즐겨요. 더구나 주머니가 후줄근한 날에도 돈 몇 천 원이면 마음을 살찌우는 책 하나를 고맙게 얻을 수 있으니 좋지요. 책에 낀 먼지는 걸레를 깨끗하게 빨아서 박박 문지르거나 살살 쓰다듬으며 닦으니 더 좋아요. 깨끗한 책을 싫어하지 않아요. 조금 지저분해진 책을 깨끗하게 추슬러 주면서 겉보기를 넘어서는 속살을 읽을 수 있으니 사람을 보는 눈매에서도 겉보다는 속을 더 살필 수 있게 되잖아요.”


― 책방에는 새로 나온 식물도감이 잔뜩 있었다. “그렇지만 난, 내 책을 고치고 싶어.” (8쪽)


 누군가 묻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 많이 보셨겠네요?” 싱긋 웃으며 대꾸합니다. “아니요. 어릴 적에 책이 어디 있어요. 다만,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여서 ‘교사용 문제집’은 잔뜩 얻어와서 숙제라며 안겨 주셨어요. 그 문제집 푸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제대로 푼 적은 거의 없어요. 밖에 나가 동무들하고 놀기 바빴는걸요. 그래도 교사 집안이라고, 또 형이 어릴 때에 똑똑해서 책을 읽힌다고 딱따구리 무슨 전집이 하나 있었고, 삼국지하고 한국역사 전집 들이 몇 가지 있었어요. 월부책장사한테 산 책일 테지요. 때때로 이 책들을 조금 들춰보기는 했지만, 형하고 저하고 가장 많이 본 책은 클로버문고 같은 만화책이었고(어머니 몰래 사서 모았습니다), 《소년중앙》이었어요. 《보물섬》은 돈이 없어서 빌려서 보았어요. 《소년중앙》에는 만들기 별책부록이 많아서 꼬깃꼬깃 모은 돈으로 꼬박꼬박 사서 보았지요. 몰래 모은 이 만화들을 어머니께서 동네 쓰레기통에 죄 갖다 버리셔서 하나도 안 남았지만요. 그러니까, 저는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교 논술시험을 준비해야 하던 그때까지는 책하고는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좋아요.”

 
 〈2〉 책은 나한테 무엇이 되었는가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에 나오는 ‘소피’는 를리외르 아저씨를 만난 덕분에 식물학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를리외르 아저씨 같은 사람도 없었고, 소피처럼 두툼한 식물도감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떠올릴 수 있던 어릴 적 제 책이라면, 어머니가 몇 차례 갖다 버리셨어도 다시 사고 또 다시 사서 갖추었던 《번데기 야구단》(까치) 같은 만화책입니다.

 글쎄, 뒤늦게 책을 깨닫고 지금은 책과 함께 살아가는 제가 된 바탕이 있다면, 아무래도 ‘책을 버리신 어머니’ 덕분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어머니로서는 ‘공부에 도움이 안 될 만화책’이어서 버리셨겠지요. 형과 저한테는 둘도 없는 보물이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책을 버리신 덕분에, ‘한 번 버려지면 다시 찾을 길이 없는 책’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 만화책들이 버려지지 않았다면, 클로버문고뿐 아니라 수많은 1970∼80년대 만화책들이 잘 간직된 채로 부천만화박물관이라든지 어디엔가 바침책으로 드릴 수 있었겠지요. 또는 제가 인천에 연 도서관 책꽂이 한쪽을 아름답게 채우거나요.

 하지만, 형과 제가 없는 용돈을 10원짜리 하나까지 아끼며 사서 모았던 책이 버려졌기 때문에, 그것도 여러 차례 버려졌기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 나이부터 다닌 헌책방에서 만난 책들을 좀더 애틋하게 돌보거나 바라볼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나는 헌책방에서 내 마음을 살찌울 책을 찾아서 읽으려 한다’는 매무새를, ‘내가 헌책방에서 만나는 이 책들을 이제부터는 하나도 버려지지 않게 잘 간직해서 내 딸아들, 또는 내 딸아들이 낳아 기를 딸아들과 그 뒤 사람들한테까지도 잘 이어질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는 꿈을 가슴 한켠에 새길 수 있었지 싶어요.

 《월간 목회》 1978년 5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동화책이 있습니다. 글쓴이는 이원수 님. 이 조그맣고 낡아빠진 책에 실린 이원수 님 동화는 ‘깨끗하고 반듯하고 큼직한 판에 글씨도 큰 새로 나오는 책’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1978년 어느 잡지 별책부록으로 당신 동화를 한데 그러모아 펴낸 이원수 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이 〈아버지와 아들〉이 좋습니다. 이원수 님은 머리말에 “나는 얘기를 하고 싶었읍니다.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내 마음속에 그냥 가두어 두고는 배길 수 없어 글로 쓴 것이 나의 동화들입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한참 암과 싸우며 시름시름 앓고 있던 이원수 님은, 아픔을 온몸으로 삭여내며 원고지를 꾹꾹 눌러 쓰셨습니다.

 동화 줄거리만 헤아리자면 요새 나오는 판으로 읽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저는 동화 줄거리만 얻고자 책을 읽지 않습니다. 헌책방에서 묵은 책으로 굳이 찾아서 읽을 때에는, 이런 책들이 처음 나오던 때 느낌을 함께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헤아려 볼 수 있어요. 그때 이 책이 책방에 깔리며, 또 그때 사람들 손에 쥐어지면서 어떻게 다가갔는가를 가만히 톺아볼 수 있습니다.

 저한테 이 책들은 보물이 아닙니다. 늘 옆에 있는 고마운 지기처럼 살가운 동무입니다. 저한테 이 책들은 오래되어 값나가는 보물이 아닙니다. 한결같이 고운 속살을 내보이면서 마음빛이 바래지 않도록 어깨동무를 해 주는 맑은 벗입니다. 저한테 이 책들은 남 앞에서 뽐낼 만한 장서가 아닙니다. 오래도록 제 삶을 밝히고 가꾸어 주는 가운데, 제가 숨을 거두고 사라진 뒤에는 또다른 누군가한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훌륭한 이슬떨이입니다.


 〈3〉 티끌 같은 아쉬움


 그림책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를 읽으면서, 또 보면서, 또 곰곰이 되새기면서 제 책삶을 하나하나 되짚습니다. 좋은 이야기와 생각을 두루 얻는 한편으로, 몇 군데 아쉽습니다. 무엇보다도 옮김말. 아이들이 볼 그림책인 만큼, 옮긴이는 아이들 말씨와 눈높이를 조금 더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오래오래 책과 가까이하기 바라는 마음이라면, 이런 책에 담기는 말과 글은 좀더 추스르거나 다독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눈에 뜨이는 아쉬운 글월을 몇 가지 뽑아서, 딱 한 가지로만 손질해 봅니다. 이 자리에서는 한 가지로만 손질했지만, 저마다 다 다른 말씨를 살리면서 손질하여 다시 쓰면 더 좋겠습니다.


 ┌ 나무에 대한 건 뭐든 다 나와 있어요
 └→ 나무 이야기는 뭐든 다 나와 있어요

 ┌ 이 표지는 제 몫은 다한 것 같으니
 └→ 이 껍데기는 제몫은 다한 것 같으니

 ┌ 이 기계로 크기를 맞추는 거야
 └→ 이 기계로 크기를 맞춘단다

 ┌ 그림이 있는 페이지를 빠뜨리셨어요
 └→ 그림이 있는 종이를 빠뜨리셨어요

 ┌ 아까 그림 속의 그 사람이야
 └→ 아까 그림에 그려진 그 사람이야

 ┌ 실의 당김도, 가죽의 부드러움도, 종이 습도도, 재료 선택도
 └→ 실 당김도, 가죽 부드러움도, 종이 습도도, 재료 고르기도

 ┌ 아버지 손은 마법의 손이에요
 └→ 아버지 손은 마법 손이에요



 “두 번 다시 뜯어지지 않는” “나만의 책”을 품에 안게 해 준 를리외르 아저씨는, 아이한테 책을 가꾸고 돌보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어린아이 스스로 살갗으로 느끼도록 이끌어 줍니다. 할아버지는 아이가 보던 책 줄거리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고, 또 알기 어렵겠지만, 당신이 손질하는 책을 보는 사람이 그 책을 아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읽어내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당신 손으로 책에 새 숨결을 불어넣었지요. 아이는 이 숨결을 느끼면서 자기가 아끼는 것은 책이 아니라 책에 담은 이야기임을 차츰 깨닫습니다. 부드러운 그림결로 두 사람 삶을 차분히 담아낸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이기에 여러모로 돋보입니다. 하지만, 책날개를 두 가지나 붙여서 만들어야 했을까 싶어 아쉽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 값으로 1만 원이나 붙게 한 만듦새는, 이 그림책을 그려낸 사람 마음까지 속깊이 헤아리지는 못한 듯합니다.

 찬찬히 적었어야 할 옮김 말투와 함께 ‘지나친 꾸밈새가 되어 버린 책날개나 만듦새’를 되짚거나 다스릴 수 있다면,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라는 그림책은 더 많은 아이들한테 살뜰한 벗으로, 또 지기로, 또 길동무로, 또 이웃 아주머니나 할아버지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0.9.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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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2007-10-05 11:49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 번역문장으로 이렇게 고쳤으면 좋겠다는 내용에 마구 공감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