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2024.8.24. 말모이
전주서 진주로 건너가는 아침에 기차에서 적는다.
1982년에 들어간 어린배움터에서는 주시경을 따로 가르쳤다. 그즈음에는 세종임금보다 주시경 님을 높이 여겼다고 느낀다. 아무렴, 마땅한 일인데, 주시경 님은 우두머리가 아닌 우리 곁에서 나란히 숨쉬며 살던 어른이자 홀로서기(독립운동)에 나선 분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독립운동가 이름에서 슬그머니 주시경을 솎더니, 세종임금만 높이 받드는 모임과 나라(정부)가 또아리를 틑고, 한글과 말모이를 아예 지우다시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따로 영화 〈말모이〉가 안 나왔다면 감쪽같이 잊힐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 〈말모이〉가 나오기는 했되, ‘한글과 말모이와 주시경’이 아닌, ‘조선어학회와 큰사전과 말모이’라는 다른 이름이 오히려 크게 나부낀다.
남북녘 말글지기(언어학자)는 다 주시경한테서 배웠을 텐데, 남녘도 북녘도 저마다 끼리끼리 학벌과 단체로 갈려서 그들 밥그릇으로 치닫는다.
그러고 보면, 주시경 님을 빼고는 말글지기는 하나같이 어렵게 글을 썼고 한문을 사랑했다. 허웅과 몇몇 분을 빼고는 그야말로 ‘한문범벅 국어학’을 할 뿐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왜 ‘사전’이라 안 하고 ‘모이’라 했을는지 우리 스스로 생각할 노릇이다. ‘사전’은 일본말이거든. 군사제국주의로 쳐들어온 일본이 휘두르는 낱말을 어찌 함부로 쓰겠는가? 더구나 ‘국어국문학’이란 이름은 “군사제국주의 일본”이 새로 엮은 말이고, '국어국문학 = 일어일문학'이다. 이 얼거리가 거의 100해에 이르며 우리나라와 일본을 휘감았고, 이제 일본은 '국어국문학'이라는 군사제국주의용어를 안 쓴다.
말모이가 왜 말모이였는지, 이 작은 말씨 한 톨을 이 땅에 심으려고 오지게 땀흘린 어른을 헤아릴 수 있을 때라야,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참다이 살림눈을 뜨고 어깨동무를 이루는 새길을 걸을 만하지 싶다.
나는 걷는다. 등짐에 책을 잔뜩 담고서 뚜벅뚜벅 걷는다. 지난날 주시경 님이 주보따리로 살던 길을 더듬는다. 나는 아무래도 숲보따리로 천천히 걸어간다고 느낀다. 나무한테서 받은 종이에 이야기를 얹은 책을 읽고 쓴다. 손으로 종이에 노래를 쓰고서 이웃한테 건넨다.
나는 또 쓰고 새로 짓는다. 옛어른은 말모이를 일구려 했으니, 나는 말숲을 가꾸려고 한다. 말꽃을 피울 말씨를 심고서 숲노래를 부르려고 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