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참하게 (2022.11.22.)
― 서울 〈북티크〉
용산 〈뿌리서점〉을 들렀으나 늦게 여시는 듯해서 책마실을 하지는 못 했습니다. 어떡할까 헤아리다가 〈북티크〉가 멀지 않아 전철을 타고서 찾아갑니다. 골목 안쪽에 깃든 책집은 고즈넉합니다. 바깥에서 부릉거리는 소리가 스미지 않고, 조용조용 어우러지는 마을빛을 그대로 품습니다.
느긋하면서 넉넉하게 둔 책시렁을 돌아봅니다. 책 한 자락을 살며시 누리는 터전에 깃들며 생각합니다. 시골에는 책집이 없기에 누리책집에서 사거나, 오늘처럼 서울마실을 나온 날에 신나게 장만합니다. 책집을 날마다 가볍게 마실할 수 있다면 굳이 등짐 가득 사지 않습니다. 아니, 날마다 여러 책집을 마실하더라도 눈에 밟히는 책은 바리바리 사들이고야 맙니다.
한꺼번에 즈믄(1000)을 장만하건 온(100)을 장만하건 열(10)을 장만하건, 우리가 한(1) 자리에 앉아서 읽는 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스무 자락 책을 옆에 쌓아놓고서 읽더라도 하나하나 집어서 폅니다. 여러 사람하고 마주앉아 말을 할 적에 여러 목소리를 듣더라도, 목소리 하나하나 가려서 대꾸하기에 비로소 이야기입니다.
서울에도 나무가 자라고, 나무가 자라니 풀벌레하고 지렁이가 깃들고, 풀벌레에 지렁이가 숨쉬니, 살며시 새가 찾아와서 노래합니다. 서울에도 골목이 있으니, 이 골목에서 곱게 살림을 짓는 이웃이 있고, 서울이웃은 하루를 가만히 그리고 짓고 일하다가 〈북티크〉 같은 마을책집으로 나들이할 만합니다.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르기에 빛납니다. 다 다른 우리는 다 다른 책을 손에 쥐면서 다 다른 우리 보금자리를 일구기에 아름답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모두 똑같은 책을 쥐어야 한다면 종살이로 치닫는다고 느껴요.
으뜸책(베스트셀러)이 나쁘다기보다는, 으뜸책에 사로잡히거나 홀리면, 우리는 그만 우두머리가 시키는 대로 휩쓸려서 ‘다 다른 나’를 잊기가 쉬워요. ‘나래책(스스로 마음과 생각에 나래를 펴도록 북돋우는 책)’을 손에 쥘 적에는, 이 나래책이 고작 열 해 동안 온(100) 자락조차 못 팔렸더라도, 참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일구는 길동무로 삼을 만합니다.
꽃송이가 커다랄 수 있지만, 꽃망울이 조그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들꽃이라면, 들꽃을 담은 작은책을 곁에 둘 적에 눈망울을 밝힐 테지요. 알아보기에 아름답고, 알아차리기에 착합니다. 차근차근 배우기에 차곡차곡 익혀요. ‘참’을 가리키는 셈은 ‘온(100)’인데, 99도 101도 아닌, 오롯이 즐거운 빛과 길이 100입니다. 이제 책마실을 마치고 고흥으로 돌아갑니다. 햇빛으로 걸었으니 별밤으로 쉽니다.
ㅅㄴㄹ
《안락사회》(나우주, 북티크, 2022.8.31.)
《아기 악어 악악이》(장승욱, 매스메스에이지, 2020.1.3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