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32 사이좋게 새기는 새벽
― 배달말을 갈무리한 낱말책
국립국어원 낱말책은 얼마 앞서까지 “분류(分類) : 1. 종류에 따라서 가름. ‘나눔’으로 순화”처럼 풀이했으나, 2024년에는 “분류(分類) : 1. 종류에 따라서 가름.”에서 자릅니다. 뒷걸음을 치는 뜻풀이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말로 쉽게 고쳐쓰는 길을 이따금 밝히기도 했으나, 슬그머니 이 대목을 덜어내더군요.
어른 가운데 한자말 ‘분류’를 굳이 찾아볼 사람은 아마 없을 만합니다. 뒷걸음 뜻풀이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만합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 낱말책은 다음 뜻풀이로 엿볼 수 있듯, 매우 엉성하고 엉터리이기까지 합니다.
가르다 : 1.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다 3. 옳고 그름을 따져서 구분하다
나누다 : 1.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다 2.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하여 분류하다 4. 몫을 분배하다 5. 음식 따위를 함께 먹거나 갈라 먹다
구분(區分) :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전체를 몇 개로 갈라 나눔
우리말 ‘가르다’를 ‘나누다’로 풀이하는데, ‘나누다’는 ‘가르다’로 풀이합니다. 게다가 ‘가르다·나누다’ 뜻풀이에 한자말 ‘구분’에 ‘분배·분류’를 넣고, 한자말 ‘구분 = 갈라 나눔’으로 풀이합니다. 겹말풀이에 돌림풀이요, 틀리고 어긋난 풀이입니다.
여러 이웃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찾아옵니다. 우리나라 이야기를 눈여겨볼 뿐 아니라, 우리말을 익히는 이웃도 늘어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누리는 길잡이로 삼을 낱말책은 얼마나 있을까요?
낱말책은 낱말을 더 많이 실어야 하지 않습니다. 새로 펴내는 낱말책이라 하더라도, 새로 태어나는 낱말을 미처 못 담습니다. 낱말책은 “더 많이 담기”가 아닌 “제대로 담기”로 나아가야 알맞고 알차며 아름답습니다.
낱말책을 들추는 어른은 드물지만, 낱말책을 들추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많습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는 늘 낱말책을 들출 수밖에 없습니다. 종이 낱말책을 들추든, 누리그물에서 찾아보든, 말뜻과 말결과 말씨를 가장 자주 찾아보는 사람은 어린이와 푸름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어느 낱말책이건, 언제나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뜻풀이를 가다듬고 보기글을 붙이고 쓰임새를 밝히면서 알려야 알맞습니다. 열 살 어린이가 읽으면서 못 알아들을 만한 뜻풀이라면, 낱말책이 틀렸거나 엉성하거나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또한, 낱말책은 새말을 너무 많이 실으려고 애써야 하지 않습니다. 말글지기가 엮거나 지은 새말이 아닌, 사람들이 흔하게 쓰는 새말이 아닌,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삶터와 마을과 보금자리에서 문득 생각을 빛내고 밝혀서 스스로 새말을 짓는 징검다리 노릇을 할 낱말책입니다.
산복(山腹) : 산에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는 곳 = 산비탈
한자말 ‘산복’이 따로 있는 줄 뒤늦게 알았습니다. 부산에 ‘산복도로’가 있는 줄 익히 알되, 부산에만 있는 길로 여겼는데, 마산에도 ‘산복도로’가 있더군요. ‘산복도로’라는 말은 인천·경기나 강원에서는 그리 안 쓴다고 느낍니다. 부산·경남에서 흔히 쓰는 듯합니다. “비탈에 낸 길”이란 뜻이고, 일본 한자말입니다. 그냥 일본말이라 해도 됩니다.
인천에서는 ‘고개·고갯길’이나 ‘언덕·언덕길’이라 합니다. 고장마다 비슷하면서 다를 텐데, ‘고개·언덕’을 흔히 쓰고 ‘재·잿길’이나 ‘비알·비탈’하고 ‘비알길·비탈길’을 함께 씁니다. ‘새재·질마재·싸리재’ 같은 ‘재’가 일본말 ‘산복도로’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낱말책은 마을길이나 고갯길을 어느 만큼 제대로 짚으면서 알뜰히 풀어낼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여러 고장에 제법 뿌리내렸다고 여기는 이름이나 말씨라 하더라도, 참하고 상냥하게 다독여서 풀어내는 길을 들려줄 수 있는 낱말책이 있는지 되새길 일입니다.
마음소리인 말
우리는 마음을 소리에 얹어서 말로 나타냅니다. ‘마음소리 =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말’은 말밑이 같습니다. ‘마’가 밑동입니다. 이 ‘마’는 ‘마녘’을 가리키기도 하고, ‘많다’를 이루는 밑동이기도 합니다. 또한 ‘마’는 ‘무’하고 잇닿으면서 ‘말·물’은 말밑이 얽힙니다.
노래하듯 흐르는 가없는 물처럼, 노래하듯 나타내고 나누는 가없는 말입니다. 냇물도 바닷물도 샘물도 늘 싱그럽고 맑게 솟아나고 흐르고 일렁이고, 마음에 담는 말도 늘 새롭고 밝게 솟아나고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낱말책을 열 살 어린이가 쉽게 읽고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물처럼 노래하는 말로 퍼지고 깃들려면, 어려운 말이 아닌 살림살이를 사랑으로 가꾸는 숨결이 흐르는 숲빛말일 노릇입니다. 책상맡에서 엮는 말로는 먹물에 그칩니다. 머리를 써서 여미는 말로는 어깨동무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이가 “어진 사람”인 ‘어른’ 곁에서 살림빛을 숲빛으로 물든 사랑으로 물려받을 적에 비로소 말답습니다. 아이가 “사랑으로 씨앗을 품은 사람”인 ‘어버이’ 품에서 보금자리를 돌보는 손길로 익힐 적에 비로소 말답습니다.
모든 말은 살림을 사랑으로 짓는 마음을 품은 숲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말이 아닙니다. 풀꽃나무와 들숲바다가 어우러진 오늘 이곳에서 해바람비를 머금는 사람이 마음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을 적에 비로소 말 한 마디가 태어났습니다. 딱딱하거나 어려운 말은 모두 “사랑도 살림도 없는 부스러기(지식·정보)”이기 일쑤라서, 그저 외우지 않고서는 모릅니다. 외워야 쓸 수 있는 부스러기로는 생각을 못 밝히고 못 빛냅니다. 사랑을 짓는 어른과 사랑을 심는 어버이가 함께 숲빛으로 다독이고 달래어 일군 말이기에, 오래오래 입에서 입으로 이어받고 몸에서 몸으로 물려받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퍼지는 말로 숨빛을 품었습니다.
사이좋게 새기는 새벽
사람은 하늘하고 땅 사이에서 삶을 누립니다. 사람 곁에는 새가 있어서 노래를 베풀고, 보금자리를 가꾸는 슬기를 배웁니다. 사람은 사랑을 스스로 심고 가꾸는 씨앗으로 생각을 짓는 마음을 펴기에 그야말로 사람답습니다. 긴긴 꿈을 누리는 고요한 밤을 거치는 고치에서 깨어나야 날개돋이를 하는 애벌레입니다. 애벌레는 날개돋이를 거쳐서 나비로 거듭납니다. 사람은 작은 씨알로 숨을 얻고서 긴긴 날을 꿈으로 그린 끝에 환하게 태어나서 아기라는 몸을 입습니다.
밤이 걷히면서 새벽이 밝듯, 고요히 앞꿈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말로 생각을 엽니다. 사람으로서 새랑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마음을 말소리로 얹어서 낱말책을 여민다면, 어른은 어른스럽고 아이는 눈을 밝히면서 이 낱말꾸러미로 기쁘게 말빛을 살펴볼 만합니다.
후다닥 읽고서 외우려 한다면, 외우지도 못 하지만, 마음에 남지도 않습니다. 느긋느긋 읽으면서 나긋나긋 새길 적에, 비로소 온마음으로 스며들면서, 생각이 깨어나는 빛을 느낄 만합니다.
차근차근 곱씹고 되새기면서, 즐겁게 손보고 더하고 다듬고 고치고 살피는 매무새로, 우리말을 이제 처음으로 익힌다고 여기면서 눈뜰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을 알찬 낱말책을 곁에 놓는다면, 하루하루 자라나고 말결을 느끼면서, 차곡차곡 북돋우는 말살림을 누릴 만하리라 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