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숨은책 920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윤정모 글

 고려원

 1988.5.5.



  여태껏 숱한 이들이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장관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꽃할매(종군위안부 피해자) 마음에 다가서거나 손을 맞잡으면서 응어리를 푼 일이 없습니다. 이쪽에 있다는 벼슬아치도, 저쪽에 있다는 벼슬꾼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나라지기·벼슬아치·글바치뿐 아니라, 우리부터 스스로 꽃할매하고 썩 이웃을 못 한 터라, 이 굴레가 고스란히 이은 셈이지 싶습니다. 더욱이 임옥상 씨를 비롯해 적잖은 이들은 추레질(성추행·성폭력)을 일으켰고, ‘기억의 집’이라는 터전까지 헐어내야 했습니다. 2023년에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를 써낸 윤정모 님인데, 아주 한참인 예전 어느 날 《정신대 실록》을 읽었다고 합니다. 1981년에 임종국 님을 찾아뵙고서 말씀을 여쭌 뒤에 1982년에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처음 선보였고, 1988년에 조그마한 꾸러미로 다시 나옵니다. 이 글자락은 1991년에 영화로도 나왔으나, 영화를 찍은 사내는 ‘꽃할매 눈물앓이’가 아니라 ‘젊은순이 벗은몸’을 그려내는 데에 사로잡혔어요. 창피한 일입니다. 눈물과 생채기와 응어리를 오히려 장삿속으로 갉아먹었거든요. 가난하고 조그맣던 어린순이는 숱하게 끌려가서 노리개로 구르다가 스러졌습니다. 가난하고 조그맣던 어린돌이는 끝없이 끌려가서 짐꾼에 심부름꾼으로 구르다가 이슬(전쟁터 총알받이)로 스러졌습니다. 얼마나 일본제국주의 총칼에 밟혀서 죽고 다쳤는지 알 길이 없지만, 가난하고 낮고 작은 사람들은 몽땅 시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오늘날에도 돈·이름·힘이 있으면 군대에 안 끌려가고 빠져나옵니다. 예나 이제나 젊은날에 꽃봉오리로 피어나지 못한 채 꺾이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열일고여덟 살 무렵에, 또 스물한두 살과 스물너덧 살 무렵에, 동무나 또래한테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같은 책을 함께 읽고서 생각을 북돋우고 우리 앞길을 새로 짓는 그림을 펴자고 말을 섞으려 했지만, 다들 고개를 돌리더군요. 100사람한테 물으면 1사람쯤 귀를 열어요. 그러나 귀를 연 1사람이 있으면 기쁘게 함께 읽고서 수다꽃을 피웠습니다. 푸른꽃이란 풀꽃이고, 풀꽃이란 들풀이고, 들풀이란 작고 낮고 흔한 숨빛이되, 온누리를 맑고 밝게 보듬는 바람빛이라고 느낍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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