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소개하는 글’이란 뭘까?


 새로 나오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 누구나 읽으면 좋겠다 싶은 책을 하나 고를 수 있을까요. 수많은 책들은 수많은 ‘다 다른 읽을이’를 겨냥해서 세상에 나오지 않을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 세상에서는 ‘자기 계발’이라는 탈을 쓰고 ‘돈벌이-이름내기-권력 얻기’에 매달리는 사람들 읽을거리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이런 책만이 읽힐 만한 책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계발’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책을 읽으면 자기 계발이 안 될까요. 교육 이야기를 읽으면, 어린이책을 읽으면, 수필이나 시를 읽으면 자기 계발이 안 될까요. 이 세상 모든 책은 처음부터 ‘그 책을 읽는 사람한테 자기 계발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이끄는 눈길과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교훈’이라는 말도 곰곰이 짚어 봅니다. 이 세상 어느 책도 ‘교훈 없는 책’이란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교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갈래로 나눌 만한 책인지, 어떤 이야기감을 어떤 눈높이와 생각과 마음밭으로 곰삭여서 펼쳐냈는지라고 느낍니다. 어떤 자리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인지, 어느 곳에서 담아낸 그림과 사진인지가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지율 스님이 밥굶기저항을 하며 썼던 글을 묶은 《초록의 공명》(삼인)이 있고 《지율, 숲에서 나오다》(숲)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책을 읽으면서 지율 스님 이야기와 성철 스님 이야기가 다르지 않구나 하고 느낍니다. 깊이가 다를까요, 너비가 다를까요. 두 분이 있던 자리가 다를 뿐, 그 다른 자리에서도 세상과 사람과 우리 삶터를 바라보는 눈매와 손매는 한결같구나 싶어요.

 아룬다티 로이 님이 쓴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를 거듭 다시 읽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시울)를 꼼꼼히 되짚으면서, 왜 우리 나라에서 ‘여성 작가’라고 하는 분들은 이렇게 ‘너른 어머니 자연’ 같은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며 둘레에 나누지 못할까 싶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제가 우리 삶터와 세상을 좀더 곰살맞게 헤아리지 못해서 드는 느낌이겠지요. 이효재 님 발자취만 더듬어도, 고정희 시인 발자국만 되밟아도, 그림을 그리는 박인경 님이라든지, 소설을 쓰는 공선옥 님 살아가는 이야기만 엿보아도 이런 말은 함부로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에는 ‘글쓴다는 여성’, ‘기자라고 하는 여성’, ‘활동가라고 말하는 여성’, ‘대학교수라는 이름쪽 내미는 여성’만을 곧잘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일본사람 우자와 히로후미 님이 쓴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소화)를 읽으며 울컥 합니다. 첫째,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은 우리 삶터에 걸맞게 우리 스스로 엮어내지 못한다는 슬픔 때문에. 둘째, 이런 이야기를 형편없는 번역으로 망가뜨려 놓았다는 짜증 때문에.

 1990년대 첫머리에 나온 《녹색평론》 서너 권을 헌책방에서 삽니다. 벌써 읽었던 글이 있고, 낯선 글도 있습니다. 뒷날 낱권책으로 묶인 글도 보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국사람이 쓴 글은 세월이 흐를수록 해묵었구나 싶은 느낌이 짙은데, 나라밖 사람이 쓴 글은 세월이 흘렀어도 빛이 안 바래네 하는 느낌이 짙습니다. 뭘까요. 문화제국주의에 찌든 눈길이라서 이럴까요.

 일본 그림쟁이 도미야마 다에코라는 분이 한국 그림쟁이 이응노 님을 파리에서 만나며 나눈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를 일곱 달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으며 어젯밤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응노 님이 펼친 이야기가 거의 막바지가 될 무렵, 다음처럼 한 마디 불쑥 합니다.


.. 도미야마 씨는 그렇게 서베를린에도 동베를린에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어떤 나라라도 여행할 수 있으며,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서 발표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일본사람은 행복한 거예요. 내 인생은 36년 간을 일제 지배 하에서 보냈고,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분단국가와 독재정권 속에서 내 나라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30년을 지내 왔어요. 우리들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발표하면 박해를 받게 되니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겁니다 ..  (175쪽)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서슬퍼렇게 있습니다. 다만, 요즈음은 숨을 죽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자기가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담아낼 자유’가 제대로 없습니다. 저마다 담아내는 이야기가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떠나서, 이런 옳고그름 가르기는 나중 일이고, 어떤 생각이든 이야기이든, 저마다 자기 깜냥을 살려서 나타낼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권리조차 없습니다. 아니, 자유와 권리를 느끼며 생각하고 살아가는 마음밭부터 일구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냈다가는 굶어죽기 딱 알맞다고 합니다. 꿋꿋하게 가난과 싸우거나 가난과 하나가 되어 즐기는 사람이 몇 사람 있으나, 웬만한 사람들은 가난은 구질구질하다고만 여겨 쉬 내동댕이치고 돈사랑으로 끄달립니다.

 제도권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들 마음밭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습니다. 남자는 군대에 이끌리며, 여자는 상업주의로만 치닫는 자본주의에 물들며 젊은 날을 ‘돈’ 하나에 매달리도록 나뒹굴어야 합니다. 자기 먹을거리, 입을거리, 잠잘곳, 쓸거리를 손수 장만하거나 갖출 수 있는 터전이 온통 무너졌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제 손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합니다. 유기농곡식을 찾아도 생협 매장을 찾아가려고 하지, 텃밭농사를 일군다거나 스트로폼농사를 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옷 한 벌을 입어도 값싼 옷이든 예쁜 옷을 입으려 하지, 손수 천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실을 자아서 옷을 짓는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어쩌면 ‘실을 잣다’라는 말도 못 알아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을 자아서 입든 말든, 이렇게 할 생각을 처음부터 안 하도록 빈틈없이 제도권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살아갈 집을 마련하는 일도 그렇지요. 변기를 어떻게 쓰는지, 부엌을 어떻게 쓰는지, 방은 어떻게 쓰는지, 불은 어떻게 때는지, 창문은 어떻게 다는지, 마당은 어떻게 꾸미는지, 처마는 어떻게 다는지, …… 이 모두를 우리 손으로 하지 않아요. 물은 어떻게 마시겠습니까. 천장은 얼마만큼 높이겠습니까. 2층으로 할까요? 지하실을 놓을까요? 문은 어떻게 달지요? 바닥과 벽은?

 그 어느 것도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가꿀 수 없게 되어 있는 한국 사회입니다. 개성이란 조금도 없는 한국 사회입니다. 대학교까지 안 나온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사회이지만, 대학교까지 다닌 사람들 깜냥(지식)이란 무엇입니까. 대학교까지 나온 사람들 마음밭(정신세계)이란 무엇입니까. 대학교까지 지낸 세월은 우리들한테 무엇으로 아로새겨진 슬기인가요, 경험인가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글로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사진으로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유경 님이 쓴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사상사)을 읽다가 책을 덮었습니다. 집어던지려다가 말았습니다. 〈시민의 신문〉이나 〈시민사회신문〉에 실린 글은 이렇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뭘까? 왜 그렇지? 글이 왜 이러지? 외국물 먹었다고 외국물 먹은 티를 내나? 아무래도 내 눈이 삐었는가? 아무리 요즘 한국사람들 글은 줄거리만 보아야지 문장을 보아서는 한 줄도 읽어낼 수 없다고 하지만, 줄거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글을 이렇게 버려 놓으면 어쩌지?

 한국에서 사진하는 분들 가운데 ‘기무라 이헤이’를 아는 분은 몇 안 되리라 봅니다. 저도 이이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헌책방에서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를 운좋게 만난 뒤로, ‘이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진이 참 좋구나’ 싶어서 가슴을 쓸어내린 적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거의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사진평론가 와타나베 츠토무 님이 쓴 《현대일본 사진가》(해뜸)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실립니다.


.. 이른바 신인 시대라는 것이 없이 젊었을 때부터 하나의 경쟁 목표가 되어 언제나 쫓기는 마음으로 근대사진의 길을 개척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작가 활동을 계속하여 오늘날에 이른 사람이 기무라 이헤이다 ..  (203쪽)


 아무것도 없는 맨땅, 풀도 자라지 않는 모래땅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했던 기무라 이헤이 님 같은 삶이었다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찍고’ 하는 골치아픈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힘겨워하리라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삶터는, 나라는, 사회는 어떠할까요.

 일본에서 서른한 해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그만둔 평교사가 남긴 《교실 일기》(양철북)라는 책을 보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어쩔 수 없는 아이들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왜들 이렇게 영어를 좋아하는지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즉각 대답이 나온다. “멋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인기 가수들의 노래에도 영어가 잔뜩 들어가 있다. 아마도 그 영향일 것이다. “선생님, ‘미래’가 영어로 뭐예요? ‘출판’은요?”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질문을 해댄다. 나는 영어 사전이 아니다. 그냥 아는 단어만 나열해 보았지만 솔직히 말해 자신은 없다 ..  (193쪽)


 하, 저는 멋없이 살고 싶습니다. 아니 내멋대로 살고 싶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배가 고프니 쌀을 씻어 아침을 얹어 놓고 밥부터 먹어야겠습니다. (4340.9.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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