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오래붓 (2024.3.14.)

― 순천 〈취미는 독서〉



  그림꽃(만화)을 꾸준히 여미는 두 아이는 여러 붓살림을 건사합니다. 이 붓도 쓰고 저 붓도 씁니다. 이제 ‘만년필’을 쓰고 싶다고 얘기해서 어떻게 장만해야 할는지 생각해 봅니다. 시골에서는 찾기가 버거워 이웃고을 순천으로 마실을 갑니다.


  먼저 옆마을로 걷고서 읍내로 갑니다.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탑니다. 부릉부릉 굽이굽이 도는 길에 돌아봅니다. 오래도록 쓰는 붓이라면 ‘오래붓’처럼 이름을 새로 붙일 만합니다. ‘온붓’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오래오래 읽히면서 살림빛을 밝힌다면 ‘오래글·오래책’입니다. 두고두고 물려받으면서 보금자리를 가꿀 적에는 ‘오래살림’입니다. 오래 잇거나 가기에 더 낫지는 않지만, ‘오래’는 길목(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제주에서 ‘오래·올레’를 ‘골목’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바람이 센 하루이지만 볕도 넉넉합니다. 이쯤 바람이라면 가벼운 차림새로 볕바라기를 하고 새봄을 맞아들이고 봄꽃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워요. 큰아이하고 〈취미는 독서〉부터 들릅니다. 버스에서 시달린 몸을 쉬면서 추스릅니다. 읽는 눈썰미를 헤아리고, 익히면서 함께 님(임)으로 서는 이 하루를 그립니다.


  바람을 읽는 눈썰미는 밝습니다. 바다를 읽는 눈망울은 맑습니다. 하늘을 읽는 눈매는 너릅니다. 들숲을 읽는 눈길은 푸릅니다. 사랑을 읽기에 사람이요, 살림을 읽고 나누면서 지으니 살갑습니다.


  붓 한 자루로 활활 타오르면서 부아를 내고 불굿으로 몰아넣는 불씨를 일으키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가만 보면 ‘불붓’이 매우 많습니다. 붓 한 자루로 물결을 일으키고 물처럼 맑고 밝으면서 시원하게 숨쉬는 살림길을 여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아직 ‘맑붓’은 드문 듯싶습니다. 별을 헤아리면서 별붓으로 나아가고, 꽃을 품으면서 꽃붓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서울붓이 넘치고 시골붓이 드물며, 숲붓마저 적어요. 어른붓이나 어버이붓마저 찾기 힘듭니다.


  순천 저잣마실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부터’라는 대목을 큰아이하고 이야기합니다. 남이 바꾸어 주기를 바라다가는 구경꾼이 될 뿐입니다. 내가 스스로 보금자리를 푸르게 일구고 가꿀 적에는, 우리한테서 피어나는 사랑꽃이 차근차근 둘레로 퍼집니다. 내가 나로서 설 줄 알기에, 너를 너로서 바라봅니다. 어버이로서 어른답게 일어서기에, 아이로서 철들며 새빛을 그리는 하루를 꿈꿉니다.


  오늘은 별밭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뚜벅뚜벅 걷습니다. 마실길에 새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서 귀를 기울입니다. 철마다 다른 새노래를 누립니다.


ㅅㄴㄹ


《힐마 아프 클린트 평전》(율리아 포스/조이한·김정근 옮김, 풍월당, 2021.11.10.)

#Hilma af Klint #JuliaVoss

《엄마, 내향인, 프리랜서》(김민채, 취미는독서, 2023.7.7.)

《자전거를 타면 앞으로 간다》(강민영, 자기만의방, 2022.1.2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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