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창비시선 158
이대흠 지음 / 창비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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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4.2.17.

노래책시렁 406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이대흠

 창작과비평사

 1997.2.1.



  내가 바라보는 곳에 내 마음이 있습니다. 붉구슬 같은 열매를 주먹만 하게 맺는 나무를 바라볼 적에는 손끝과 눈길을 거쳐 불길 닮은 이슬이 스밉니다. 새끼손톱보다 작고 보랏빛은 봄까지꽃을 땅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마주하면 겨울이 저물면서 봄이 피어나는 숨소리가 퍼집니다. 왁자지껄한 서울 한복판에서 걸쭉한 말잔치에 끼면, 왁자지껄하고 걸쭉한 입심에 물들어요.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가 태어난 1997년 겨울을 떠올립니다. 그무렵에 저는 강원 양구 멧골짝에서 삽으로 눈을 푸다가 맨손으로 와락 씹었습니다. 키높이로 쌓이는 눈은 그칠 날이 없고, 배곪는 싸울아비는 함박눈을 뭉쳐서 밥을 삼았습니다. 나라에 왜 싸울아비가 있어야 하는지 곱씹어 보았지요. 땅을 갈아 기름진 논밭으로 일굴 사내를 바보짓으로 길들여 눈먼 바보로 뒹굴리려는 속뜻 같습니다. 글밭도 비슷합니다. 비슷비슷 구순하게 손을 내밀고 살을 섞고 몸을 비벼야 비로소 ‘서정문학’이라는 일본스런 이름을 붙이는 듯싶습니다. 그렇지만 참답게 ‘삶내음’이 흐르는 글자락이라면, 오순도순 부엌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아기를 돌보면서 벌나비랑 흙빛으로 어울리는 곳에서 고즈넉이 태어나리라 봅니다. 응큼스러이 불끈거리는 글치레는 낡았습니다.


ㅅㄴㄹ


그리운 것은 내 안으로 떠나는 것이다 // 다만 나는 / 내 속을 보지 못한다 (鵲枕/9쪽)


늙은 여자가 / 앞에 서 있는데 / 자리를 양보하기 싫습니다 차창 밖은 검은 세상 … 일곱 박스의 귤을 팔았습니다 / 리어카 끌고 셋방 갑니다 / 귤 껍질 벗기듯 마누라 벗기고 / 달콤하고 신맛도 좀 있는 밤 / 그런 귤쪽같이 붉은 시월입니다 (자화상/18쪽)


사랑이란 머릿속의 포르노 테이프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 / 그리움이란 성욕의 다른 이름 / 나는 그다지 타락한 것 같지 않은데 / 너를 만나면 관계하고 싶다 (꽃핀 나; 검증 없는 상상/32쪽)


아침 일곱시 무렵에 전철을 탄다 / 허벅지가 드러난 / 치마를 입고 내 앞에 붙어 있는 여자 순간 나는 / 본능만의 성교를 꿈꾼다 강간이나 / 추행이라는 무서운 말들이 / 내 안에 있구나 불현듯 / 아버지를 죽인 한 아들이 신문 속에서 / 내 마음과 함께 구겨지고 (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42쪽)


저리도 많은 젖가슴 달고 / 정신이여 // 평생에 풀어내지 못한 말들이 / 풀로 돋아 // 젖내음 같은 바람 불고 / 호랑나비는 하늘을 찢지 않으며 날아간다 (4·19 묘지에서/83쪽)


+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이대흠, 창작과비평사, 1997)


내가 없었을 때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 내가 없을 때 온누리는 짐승판이었다

→ 내가 없던 때는 온통 짐승나라였다

12쪽


이따금 하자 보수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 이따금 고쳐야 할 때도 있지만

→ 이따금 손봐야 할 때도 있지만

→ 이따금 기워야 할 때도 있지만

12쪽


그리움이란 성욕의 다른 이름

→ 그리움이란 발딱질 다른 이름

→ 그리움이란 불끈질 다른 이름

32쪽


너를 만나면 관계하고 싶다

→ 너를 만나면 몸섞고 싶다

→ 너를 만나면 살섞고 싶다

→ 너를 만나면 뒹굴고 싶다

32쪽


치마를 입고 내 앞에 붙어 있는 여자 순간 나는 본능만의 성교를 꿈꾼다

→ 치마를 입고 내 앞에 붙은 가시내 갑자기 나는 몸을 섞고 싶다

→ 치마를 입고 내 앞에 붙은 가시내 문득 나는 부둥켜안고 싶다

42쪽


철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노여움으로부터

→ 철들기란 둘레를 미워하는 마음부터

→ 철들려면 바깥에 발끈하는 마음부터

46쪽


평생에 풀어내지 못한 말들이 풀로 돋아 젖내음 같은 바람 불고

→ 내내 풀어내지 못한 말이 풀로 돋아 젖내음 같은 바람 불고

8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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