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미안족 문학연대 시선 1
최영철 지음 / 문학연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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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3.12.15.

노래책시렁 381


《홀로 가는 맹인 악사》

 최영철

 푸른숲

 1994.2.14.



  우리한테는 혼자 가는 길이 없습니다. 발걸음을 내딛는 땅이 있고, 땅에 뿌리내린 나무하고 풀이 있습니다. 풀밭에 깃드는 풀벌레가 있고,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가 있어요. 비를 뿌리는 구름에 볕을 베푸는 해가 있지요. 밤에 환한 별에, 싱그러이 감싸는 바람이 있습니다. 혼자 가는 사람은 있을 턱이 없습니다. 둘레를 안 보거나 못 볼 뿐입니다. 《홀로 가는 맹인 악사》를 읽었습니다. 서른 해쯤 앞서 나온 글을 오늘 눈빛으로 섣불리 읽으면 안 될까요? 또는 이 눈길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뿌리라고 느낄 수 있을까요? 둘레를 보는 사람은 늘 함께 나아가는 이 별빛을 헤아리면서 나누고 품고 노래합니다. 둘레를 안 보는 사람은 스스로 가두고 누르면서 억지로 짜내는 글을 내놓습니다. 글밭에 있는 사람들은 왜 ‘글’이라 안 하고 ‘문학’을 붙들려 할까요? 글밭이라는 울타리에서는 왜 ‘노래’라 안 하고 ‘시’를 붙잡으려 할까요? 술 한 모금을 하더라도, 빗방울이 노래하는 곁에서 비내음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응큼하게 엿보거나 흥건하게 들이켜기보다는, 그저 풀씨를 보고 푸른들을 보면서, 이 푸른별에 어떤 이웃이 어떻게 어우러지기에 날마다 사랑으로 피어날 수 있는지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김해에서 성포까지 안내양을 / 50여 분 동안 사랑하였다 /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 혼자 상상하리라 / 사랑은 대개 그런 것이므로 / 방심한 여자의 빈틈을 이용 / 강제로 어떻게 /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 눈짐작으로 하나씩 벗겨버리는 … 졸음을 쫓기 위해 흥얼거리는 유행가 한자락 / 김해에서 성포까지 50여 분 동안 / 정신없이 그녀를 사랑하였다 / 만원버스 속을 능란하게 움직이는 / 훅, 하고 달려오는 비린 땀냄새. (몰래한 사랑 2/18, 19쪽)


우리 동네 이발소의 한쪽 나무평상에 앉아 / 흘러간 주간지를 넘기고 있으면 / 머리를 감는 세면대에서 내가 보는 / 여배우 팔등신 머리 위로 점점이 비눗물이 튕겨온다 (그 이발소/22쪽)


평양소주 한 병을 숨어서 마십니다 / 백화점의 북한생활전에 갔다가 / 떳떳하게 돈 주고 산 것인데도 / 보안법에 저촉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평양소주/52쪽)


+


《홀로 가는 맹인 악사》(최영철, 푸른숲, 1994)


정신없이 그녀를 사랑하였다

→ 헬렐레 그이를 사랑하였다

→ 허둥지둥 사랑하였다

19쪽


팔등신 머리 위로 점점이 비눗물이 튕겨온다

→ 매끈한 머리로 방울방울 비눗물이 튕겨온다

→ 잘빠진 머리로 띄엄띄엄 비눗물이 튕겨온다

22쪽


저촉되지 않을까

→ 어긋나지 않을까

→ 엇나가지 않을까

→ 틀리지 않을까

→ 걸리지 않을까

5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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