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3.7.15.

수다꽃, 내멋대로 46 모나미



  2014년부터였지 싶다. 그즈음부터 ‘모나미 볼펜’을 끊었다. 하루아침에 끊었다.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을 펴내고서 조촐히 책잔치를 서울 한켠에서 열었고, 그날 함께한 이웃님 한 분이 “숲노래 님은 늘 글을 많이 써야 하는데 ‘모나미 볼펜’ 말고 ‘좋은 볼펜’을 쓰셔야 하지 않아요? 제가 좋은 볼펜을 선물해 드려도 될까요?” 하고 얘기하셨다. “네? 좋은 볼펜이요? 좋은 볼펜이 어디 있어요? 좋은책 나쁜책이 따로 없듯, 좋은 볼펜과 나쁜 볼펜은 있을 수 없을 텐데요?” “아니에요. 아직 좋은 볼펜을 안 써 보셔서 그래요. 저는 문방구를 하는데요, 모나미 볼펜을 안 써요. 숲노래 님도 한번 모나미 말고 다른 볼펜을 써 보시고서 생각해 보셔요.” “에, 설마요? 그렇지만, 저는 글살림을 좋아하니까, 보내 주시면 써 볼게요.” 이웃님은 곧장 ‘일본 제트스트림 볼펜’ 12자루를 보내 주었다. 나는 여섯 달 동안 안 건드렸다. ‘제트스트림’ 한 자루이면 ‘모나미’ 열두 자루 값이다. 받은 글붓을 여섯 달 만에 처음으로 꺼냈다. 마침 ‘모나미’가 아주 말썽을 일으켜 쓸 수 없던 터라, “아, 그때 이웃님한테서 받은 글붓이 있었지. 그 글붓을 써 볼까?” 하고 쥐었다. 여섯 달을 묵힌 뒤에 꺼낸 글붓이지만 깜짝 놀랐다. 슥슥 글을 쓰고서 눈물을 흘렸다. 이날 저녁 곁님한테 얘기했다. “여보, 이제 모나미 볼펜을 다 버려야겠어.” 집에 있는 모든 모나미 글붓을 샅샅이 훑어서 작은 꾸러미에 담았다. 버리지는 않았다. 꾸러미에 담아 구석에 치웠다. 마흔 해를 쓰던 ‘모나미’는 다음처럼 몇 가지로 갈무리할 만하다. 첫째, 값싼 척하지만 새것인데 공(볼)이 빠져서 못 쓰기 일쑤라, 버림치를 헤아리면 하나도 값이 안 싸다. 둘째, 값싼 티를 낼 뿐이라, 대가 쉽게 휘고 먹물(잉크)이 쉽게 마르는 터라, 모나미 글붓 먹물을 마지막까지 쓴 일이 없다시피 하다. 셋째,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십 분 넘게 쥐고서 글을 쓰면 ‘손에서 나오는 기운(열)’으로 대가 휜다. 넷째, 겨울이 아닌 가을에도 ‘-5℃’나 ‘-10℃’가 아니라 ‘+5℃’에도 먹물이 굳어서 안 나온다. 다섯째, 여름이 아닌 봄에도 먹물이 쉬 퍼져서 갑자기 종이에 확 번진다. 여섯째, 싸구려 모나미 글붓에서 나오는 똥은 ‘글씨에 들어간 먹물’보다 많기 일쑤이다. 일곱째, 공이 빠지거나 꽈배기쇠(용수철)가 늘어나서 못 쓰는 일도 흔하지만, 톡톡 누르는 단추가 처음부터 먹통이라 못 쓰는 일도 수두룩하다. 여덟째, 글씨를 안 썼는데 저절로 먹물(잉크)이 새서 옷에 먹물자국이 번져 옷을 버리기 일쑤요, 수첩이나 책도 버리고, 가방까지 버린 적이 있다. 아홉째, 공도 꽈배기쇠도 톡톡이도 아닌, 앞머리가 툭 부러져 그냥 ‘속대’를 쥐고서 쓴 적도 흔하다. 열째, ‘하얀 대’보다 값을 더 받은 ‘노란 대’는 값만 더 받을 뿐, ‘하얀 대’하고 똑같은 말썽이 똑같이 있을 뿐이었다. 열한째, 어쩌다가 빗물이든 그냥 물이든 닿으면 먹통이 되어 버려야 한다. 열두째, ‘모나미 회사’가 사람들한테 고개를 숙여 숱한 말썽을 엎드려 빈 적이 없었지 싶다. 숲노래 씨는 이제 ‘일본 제브라 사라사’ 글붓을 쓴다. ‘제트스트림’도 꽤 좋으나 ‘제브라 사라사’가 훨씬 낫고, 빛깔이 골고루 있고, 굵기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나라사랑(애국)’이 나쁠 일이 없되, ‘나라미움’을 할 마음은 없다. 그저 한마디를 하고 싶다. ‘글붓 한 자루 제대로 만들지 못 하는 나라’에서 무슨 ‘과학기술’이나 ‘첨단산업’이나 ‘4차산업’이나 ‘메타버스’ 타령을 할 수 있는가? 웃기지 마라. ‘연필·볼펜’ 한 자루조차 이웃나라 발가락 때만큼도 흉내내지 못 하는 판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바탕(기본소양·기초실력)부터 엉터리라는 뜻이다. 이웃나라는 찰칵이(사진기)도 벼릴 줄 알 뿐 아니라, ‘연필·볼펜’에 ‘종이’도 정갈하고 훌륭히 선보인다. 아주 수수하고 흔한 글살림(문방구) 하나부터 찬찬히 짚고 돌볼 적에, 비로소 배움(교육)도 삶빛(인문학)도 꽃길(예술)도 벼슬(정치)도 피어나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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