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누가 가난한가 (2023.4.23.)
― 서울 〈옛따책방〉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가멸찬 사람이 있습니다. 때리는 사람이 있다면, 맞는 사람이 있어요. 높다란 자리가 있다면, 나즈막한 자리가 있지요. 좋은 일자리가 있으면, 나쁜 일자리가 있겠지요. 서울이 있으면 시골이 있을 텐데, ‘숲’이 있으면 곁에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새’가 있으면 둘레에 무엇이 있나요? ‘나비’가 있으면 가까이 무엇이 있는가요?
저는 열아홉 살에 제금을 난 뒤부터 바람이(선풍기)가 없는 살림을 보냈습니다. 바람이는 없되 부채는 건사했고, 미닫이나 가로닫이를 열고서 햇빛·별빛을 머금은 바람을 쐬는 보금자리를 누렸습니다. 두 아이를 낳아 돌볼 적에 여름밤에 아이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으면 밤새 쉬잖고 가벼이 부채질을 했습니다.
아이를 안고 등짐을 짊어지고서 걸을 적에도 한 손에는 부채를 쥐고서 아이한테 부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골이건 서울이건 나무 곁을 걷거나, 나무 둘레에서 지낸다면, 부채가 없어도 시원해요. 나무랑 부채는 짙푸른 살림길입니다.
찬바람이 서늘한 쇳더미(지하철)를 갈아타고서 〈옛따책방〉으로 갑니다. 우리는 왜 바람이(에어컨)를 써야 할까요? 부채를 쓰면 될 뿐 아니라, 들바람이며 숲바람을 맞아들이는 곳에서 일하거나 살아갈 노릇이지 않을까요?
어떤 분은 “최종규 씨네가 가난하니까 에어컨을 안 쓰겠지. 왜 다른 사람들더러 에어컨을 쓰지 말라고 하시오?” 하고 따집니다. 빙그레 웃고서 “바람이를 쓰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왜 나무를 집과 마을에 그득 두르면서 숲바람을 쐬려는 마음을 쓰지 않느냐고 여쭐 뿐이에요.” 하고 대꾸합니다.
부채를 쥐는 사람이 읽는 책은 다릅니다. 이 쇳덩이(지하철·버스)도 저 쇳더미(자가용)도 거느리지 않는 사람이 읽는 책은 다릅니다. 아기를 수레에 안 앉히고서 등에 업거나 가슴에 안고서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읽는 책은 달라요. 나무 곁에 서는 사람이 읽는 책이 다르고, 멧새노래랑 밤별을 누리는 사람이 읽는 책도 언제나 다르게 마련입니다.
작게 보면 더없이 작고, 크게 보면 언제나 큽니다. 사랑을 보면 늘 사랑을 심어서 일구고, 사랑을 안 보면 으레 ‘시늉’을 심거나 퍼뜨리더군요.
언제 보아도 이슬방울 같은 빗방울을 마시면 온몸에 기운이 짜르르 오릅니다. 언제 보아도 눈물방울 같은 빗방울로 온몸을 씻으면 온마음에 새숨이 훅 올라요. 바다방울인 물방울입니다. 눈망울을 담은 꽃망울입니다. 주머니가 가벼워 가난한 사람도 있을 테고, 마음에 숲빛이 없어서 허둥대는 가난벗도 있습니다.
ㅅㄴㄹ
《체벌 거부 선언》(아수나로 엮음, 교육공동체벗, 2019.5.5.)
《가난한 사람들의 선언》(프란시스코 판 더르 호프 보에르스마/박형준 옮김, 마농지, 2020.4.30.첫/2020.7.15.2벌)
《나비》(띳싸니/소대여 옮김, 안녕, 2021.11.15.)
《19672003 구본주를 기억함》(구본주를나르는사람들, 안녕, 2022.11.1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