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숲노래 책마실


뜰살림 (2021.7.14.)

― 제주 〈책밭서점〉



  나를 기다리는 책은 언제나 나한테 찾아옵니다. 내가 기다리는 책은 마침내 내 품에 안깁니다. 새로 태어나는 책은 아침을 밝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예전에 깨어난 책은 밤을 밝히는 별빛으로 다가옵니다.


  온누리에 괴롭힘질·들볶음·때리기·태움 따위로 가리킬 일을 모두 녹여내어 푸르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거나 들볶거나 때리거나 태우려 했어도, 빙그레 웃으면서 이 모든 멍울짓을 그들한테 되돌려주기보다는 사르르 녹인 따뜻한 빗물이나 이슬이나 눈물로 이 땅에 내려놓으려는 길을 생각합니다. 아이가 넘어질 적에 돌부리나 땅바닥을 탓할 까닭이 없습니다. 넘어진 아이를 빙그레 바라보면서 “자, 일어나서 먼지를 털고 또 달리자!” 하고 속삭이면 아이는 아프거나 다치는 일이 없이 활짝 웃으면서 스스로 빛납니다.


  요즈음 어린이는 ‘존중’이라는 어려운 말을 쓰더군요. 어린배움터(초등학교)부터 길잡이(교사)란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로구나 싶습니다. 아이들이 ‘존중’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려나 아리송합니다. 우리말로 쉽게 ‘높이다’나 ‘섬기다’를 쓸 적에 뜻이 제대로 드러날 텐데요.


  그러나 굳이 높이거나 섬겨야 하지 않습니다. “서로 높여 주고 돌봐주는” 길이 안 나쁩니다만, “스스로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는” 길로 거듭나기에 아름다워요. 사랑이 아닌 몸짓은 사랑이 아니기에 아무리 ‘좋은 뜻으로 존중하려’ 하더라도 으레 어긋난다고 느낍니다. 어려운 말로는 뜻이 제대로 안 드러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으로도 펴지 못 하게 마련입니다.


  자전거를 배에 실어 제주로 건너왔습니다. 뙤약볕이 한창인 여름날 자전거를 달리며 제주책집을 천천히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책밭서점〉에 닿아 여러 이야기를 담은 여러 책을 쓰다듬습니다. 거뜬히 짊어져야지요. 책밭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밭을 가다듬어 새롭게 글밭을 일구면, 어느새 마음밭이 푸지게 빛나면서 노래밭으로 이어갑니다.


  한 해에 하루이틀을 만나더라도, 이 하루이틀 만남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요. 뱃삯·책값·잠삯을 주섬주섬 모아 책마실길에 섭니다. 책짐을 질끈 메고 달리는 자전거는 길바닥에 땀비를 떨굽니다. 톡톡 내리는 땀비를 따라 오늘자취가 새삼스럽고, 여름빛을 받아들이는 하루가 싱그럽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건널목에서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 숨을 고르며 생각합니다. 빗물은 하늘에 낀 먼지를 씻고, 땀은 몸에 붙은 티끌을 씻고, 책은 마음에 남은 응어리를 씻어 줍니다.


ㅅㄴㄹ


《물질과 생명》(앨런 와츠/김형찬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1.7.20.)

《인생유전, 쟝 루이 바로의 일생》(쟝 루이 바로/윤동진 옮김, 홍성사, 1983.4.10.)

《東京商銀20年史》(年史編纂委員會, 東京商銀信用組合, 1974.3.21.)

《문화 차이와 인간관계》(에드워드 스튜어트/김성경 옮김, 보성사, 1989.10.20.)

《영어와 더불어 2 학창시절》(조성식, 신아사, 1992.10.31.)

《아름다운 매듭》(권도룡 엮음, 주부생활사, 1979.5.1.)

- 《엘레강스》 79.6.별책부록

《청년마당 32호》(김성수 엮음, 대한YMCA연맹, 1991.9.1.)

《수수께끼 시》(박시향, 주변인의길, 1992.9.10.)

《진눈깨비》(고정국, 서울, 1990.4.25.)

《한라산의 겨울》(김경훈, 삶이보이는창, 2003.3.27.)

《마라도 등대》(문태길, 자유지성사, 1993.3.5.)

《咸錫憲全集 17 民族統一의 길》(함석헌, 한길사, 1984.8.26.)

《トルスト-イ傳 第一卷》(ビリュ-コフ/原久一郞 옮김, 中央公論社, 1941.3.5.)

《養蠶敎科書》(裁桑及飼育の部 엮음, 朝鮮總督府, 1914. 3.15.)

《農業經濟及法規敎科書》(朝鮮總督府 엮음, 朝鮮總督府, 1915. 4.1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