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12.21.

나그네채에서 7 발바닥으로



  나는 책집마실이 아니면 바깥마실을 안 하다시피 한다. 인천으로 돌아간 2007년부터 인천을 다시 떠난 2010년까지는 골목마실을 하려고 바깥마실을 했는데, 2011년부터 살아가는 전남 고흥 시골에서는 숲들바다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 바깥마실을 하고픈 마음이 없다. 나는 어디로 어떻게 마실을 하든 몇 가지로 길을 나선다. 첫째, 걸어서 간다. 둘째, 자전거를 탄다. 셋째,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를 탄다. 부릉이(자동차)를 몰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부릉종이(운전면허증)조차 안 땄으며, 앞으로도 부릉종이는 건사하지 않을 생각이요, 부릉이를 품을 마음이란 아예 없다. 다만, 하나는 있다.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로 넘어설 즈음, 푸른배움터(중·고등학교)를 ‘정석항공고’나 ‘인천기계공고’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날개(비행기)나 부릉이(자동차)를 손질하는 사람(정비사)으로 일하는 앞날을 그리며 이모저모 살피던 그무렵, ‘사람이 몰지 않는 부릉이(무인 자동차)’가 나오면 그때에는 부릉이를 건사해 볼까 하고 동무들한테 얘기했다. 우리 어버이나 중학교 길잡이는 왜 인문계 아닌 실업계를 가려 하느냐고 타박하고 말려서 실업계로 가지 못 했고, 그 뒤로 부릉이는 없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자고 생각했다. 언제나 뚜벅뚜벅 걷는다.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그냥 해바람을 맞으면서 걷기를 즐긴다. 전철을 타러 땅밑으로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시커먼 길을 오가기보다는 그냥 해바람을 맞아들이는 길을 천천히 걸으려 한다. 이렇게 걸으면서 때바늘로 재곤 했는데, 버스나 전철을 타려고 기다리거나 움직이고서 타고 가기보다는, 처음부터 느긋이 걸을 적에 오히려 빠르더라. 이 대목을 느끼거나 아는 이웃이 있겠지? 아주 처음부터 걸어서 그곳을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고서 그냥그냥 걸으면 되레 빠를 뿐 아니라 해바람을 쐬면서 우리 몸이 튼튼하고, 더구나 발바닥으로 골목마을 한복판이나 곁을 스치면서 ‘이웃이 살아가는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서울(도시) 한켠에 풀꽃나무가 어떻게 자라면서 사람한테 방긋방긋 눈짓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서울 한복판에서도 크고작은 새를 만나고, 벌나비하고 손짓할 수 있고, 이따금 풀벌레노래까지 듣는다. 그런데 시골집을 떠나 서울(도시)에서 책집마실을 하노라면 어느새 등짐에 책이 가득하고, 품에 한 아름 책꾸러미를 안고서 걷는다. 바깥일을 보면서 책집을 다니면서 장만한 책을 이고 지고 안고서 길손집까지 간다. 그날그날 저녁하고 밤하고 새벽에 ‘오늘이나 어제 산 책’을 읽고 갈무리를 한다. 책집에서 먼저 한 벌 슥 읽고, 길손집에서 두 벌째 새로 읽고, 시골집으로 돌아가서 석 벌째 되읽으며, 책마다 겉그림이나 속종이를 긁느라(스캔) 넉 벌째 읽는다. 느낌글을 쓰려면 다섯 벌째 읽고, 책에서 고치거나 손보거나 바로잡을 글자락이 있으면 여섯 벌째 읽는다. 아름다운 책이라면 일곱 벌째 읽고, 아이들한테 읽히자면 여덟 벌째 읽고, 우리 책마루숲으로 옮기기 앞서 아홉 벌째 읽는다. 책은 발바닥으로 산다. 책은 손바닥으로 읽는다. 이웃은 발바닥으로 만난다. 이웃하고 손바닥으로 이야기한다. 이리하여 해거름에 길손채에 깃들고서 짐을 풀면 발바닥이며 종아리가 퉁퉁 붓는다. 붓고 아린 발바닥을 끙끙대면서 밤이며 새벽을 지나 아침나절에 이르면 “자, 오늘도 새로 걷고서 우리 시골집으로 돌아가자.” 하고 질끈 등짐을 메고서 다시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느끼면서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걷는다. 뚜벅뚜벅 걷고, 또박또박 쓴다. 따박따박 읽고, 나긋나긋 노래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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