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가을길 (2021.11.2.)

― 수원 〈마그앤그래〉



  우리나라는 ‘들숲바다·풀꽃나무·해바람비’를 몹시 싫어하는 듯합니다. 다들 일본스런 한자말 ‘자연·생태·환경’만 쓰거든요. 그래서 ‘들숲바다·풀꽃나무·해바람비’처럼 새말을 지었습니다. 외마디 ‘숲’을 쓰기도 하지만, ‘숲’이란 말을 못 알아듣는 이웃이 무척 많아 ‘들숲바다’처럼 셋을 하나로 아우르고, 숲을 이루는 ‘풀꽃나무’ 셋을 묶으며, 숲이 태어나는 바탕인 ‘해바람비’ 셋을 여밉니다. 다른 일본 한자말로 ‘삼위일체’라고 할 만한 얼개입니다.


  숲을 싫어하는 이 나라는 들숲을 밀어붙여 잿더미(아파트 단지)를 때려짓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잿더미에서는 숨막혀 죽으니, 시늉으로라도 꽃뜰을 곳곳에 꾸밉니다. 갓 올려세운 잿더미는 그야말로 죽음냄새가 짙으나, 열 해가 흐르고 스무 해가 지나면 어느새 나무가 우거지고 온풀(잡초)이 돋습니다. 어떤 잿더미라 하더라도 스무 해가 지나면 사람내음이 감돌아요. 바로 ‘온풀’이 톡톡히 제몫을 하거든요.


  수원 〈마그앤그래〉로 찾아가는 길은 여럿입니다. 부릉이(자가용)를 모는 분이 있을 테고,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는 분이 있을 테며, 저처럼 걷는 이가 있겠지요. 큰길 아닌 샛길을 골라서 〈마그앤그래〉로 찾아가면 가을빛이 눈부십니다. 부러 사그락사그락 가랑잎을 천천히 밟으면서 잎내음을 누릴 수 있어요.


  잿더미(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깃든 마을책집은 이슬방울(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슬방울이 품은 책을 살피는 길이란 새삼스러이 ‘이슬찾기(보물찾기)’입니다. ‘돈찾기’가 아닌 ‘이슬찾기’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푸른씨(청소년)라 하더라도 그림책이며 어린이책을 신나게 읽습니다. ‘어른만 읽는 인문책’은 글결부터 딱딱하고, 줄거리를 너무 어렵게 비틀거든요. 우리는 아직 시골에서 스스로 살림을 지으면서 살림빛을 어질게 품은 살림책(인문책)을 제대로 쓰는 어른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길든 말씨’가 아닌 ‘새로짓는 말길’을 터야 비로소 살림글이요 살림책이거든요.


  햇살이 눈부시게 스미는 마을책집은 환합니다. 모든 책은 종이로 묶고, 모든 종이는 숲에서 아름드리로 자란 나무한테서 왔고, 모든 나무는 해바람비를 머금습니다. 책은 해를 마주하며 읽어야 맛깔스럽습니다. 책은 풀밭에 앉거나 서거나 누워 읽어야 즐겁습니다. 책은 비오는 날 읽으며 촉촉히 스밉니다. 책은 별빛에 기대어 읽기에 반짝반짝 감겨듭니다. 숲에서는 풀꽃나무라는 숨결이 책이고, 잿더미에서는 ‘숲한테서 받은 종이’로 여민 꾸러미에 살림살이 이야기를 사뿐히 얹은 마음빛이 책입니다. 모든 책은 숲이고, 모든 책은 살림이고, 모든 책은 나·너입니다.


ㅅㄴㄹ


《길》(주나이다 그림, 비룡소, 2021.9.30.)

《왜 좋은 걸까?》(기쿠치 치키 글·그림/김보나 옮김, 천개의바람, 2021.7.3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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