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숨결하고 사람 (2022.5.23.)

― 서울 〈메종인디아〉



  마을논에서 이따금 고라니를 만납니다. 가볍게 소리를 내고는 폴짝폴짝 뛰고 달리는 고라니는 싱그러운 풀을 즐깁니다. 이 땅에 사람하고 뭇숨결이 어우러지던 지난날에는 고라니도 여우도 곰도 범도 고슴도치도 수달도 늑대도 함께 들빛을 머금으면서 보금자리를 일구었어요. 이제 웬만한 숲짐승은 삶터를 빼앗기면서 목숨을 모조리 잃었고, 고라니는 길에서 자꾸 치여죽습니다.


  고라니마저 이 땅에서 사라지면 사람은 얼마나 잘 살아갈 만할까요? 개구리도 두꺼비도 맹꽁이도 뱀도 이 땅에서 쫓겨나면 사람은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갈 만한가요? 이웃숨결을 잊는 만큼 이웃사람을 잊습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 넋은 늘 우리를 밝히는 빛이리라 생각해요. 누구를 만나 어떤 길을 가든 우리 얼은 늘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라지는 숲짐승을 바라보면서 들꽃 같은 사람들이 밀려나거나 밟히는 모습을 느낍니다. 삶터를 빼앗기는 새나 풀벌레나 풀꽃나무를 마주하면서 들풀 같은 사람들이 고달프거나 눈물짓는 모습을 느껴요.


  봄빛을 머금으면서 서울로 달립니다. 시외버스에서 ‘고라니’ 이야기를 노래꽃으로 씁니다. 사람인 이웃뿐 아니라 푸르게 어깨동무할 뭇숨결을 함께 헤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몇 줄 글에 얹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님은 《저만 알던 거인》이라는 이야기를 남겼어요. 오늘 우리는 “저만 알던 사람”이나 “저만 알던 사납이·글꾼·힘꾼·이름꾼·돈꾼”을 맞대어 볼 만하다고 느낍니다. “서로 알아가는 사이”로 나아가지 않을 적에는 수렁에 잠기다가 끝내 죽음구덩에 빠지리라 봅니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전철을 갈아타고서 〈메종인디아〉로 찾아갑니다. 봄이 무르익으니 입가리개를 벗고서 햇볕하고 사귀는 터전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요. 나무도 멧새도 벌나비도 입가리개를 안 합니다. 사람도 홀가분히 털어내고서 만나야지 싶어요. 서울 한복판을 거닐다 보면 부릉부릉 매캐해서 돌림앓이 탓이 아니라 그저 숨이 막히기는 합니다만, 목소리를 낼 말길도 나란히 열어야지 싶고요.


  저마다 다른 책은 저마다 다른 목소리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눈길로 밝히면서 저마다 새롭게 꿈을 키우기에 온갖 책이 태어나요. 어느 들꽃도 다른 들꽃을 흉내내지 않듯,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오늘을 글로 옮기기에 아름답습니다. 어느 나무도 우쭐거리거나 혼자만 살려고 하지 않듯, 우리는 다 다른 숱한 책을 두루 사랑하고 품을 적에 어질며 참한 어른으로 설 만합니다. 


ㅅㄴㄹ


《홍차와 장미의 나날》(모리 마리/이지수 옮김, 다산책방, 2018.10.19.)

《세 갈래 길》(래티샤 콜롱바니/임미경 옮김, 밝은세상, 2017.12.15.)

《내가 좋아하는 것들, 산책》(이정하, 스토리닷, 2022.4.2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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