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다섯 (2021.12.24.)

― 순천 〈도그책방〉



  가을이 깊어갈수록 새로 돋는 풀이 줄어듭니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면 바야흐로 모든 들풀이 고개를 꺾으면서 시듭니다. 아직 여린 풀잎이 있다고 여겨 흙으로 돌아가지 않은 풀벌레나 잎벌레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만 꽁꽁 얼어붙습니다.


  겨울은 풀벌레노래가 잠드는 철입니다. 그렇지만 겨울철새가 찾아오고, 겨울텃새가 나란히 노래합니다. 시골이 아닌 큰고장(도시)에서 살아가기에, 더구나 큰고장에서도 잿빛집(아파트)에서 살아가기에, 게다가 아직 부릉이(자동차)를 건사하기도 하기에, 도무지 풀벌레노래를 못 듣는 하루라고 말하는 이웃님이 있습니다. 저는 이 이웃님한테 “풀벌레노래는 풀밭에서도 듣지만, 어디에서도 듣는걸요. 마음이 없으면 풀밭뿐 아니라 숲에서도 풀노래를 못 듣고, 마음이 있으면 서울 한복판 파란지붕집(청와대)에서도 듣게 마련입니다.” 하고 속삭입니다.


  바다 건너 이웃나라는 12월에도 따뜻하니 그곳에서 울려퍼지는 풀노래가 있어요. 날마다 밤이면 먼먼 이웃별 숨결이 빛살을 타고서 우리 별로 찾아듭니다. 겨울하늘을 가득 덮은 구름은 드넓은 바다에서 피어난 아지랑이가 모여서 이뤄요.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어느 바다 물결노래일까?” 하고 그립니다.


  그림책을 펴며 풀노래를 듣기도 합니다. 풀빛을 옮긴 그림책에서는 푸른노래를, 하늘빛을 옮긴 그림책에서는 파란노래를, 열매빛을 옮긴 그림책에서는 붉은노래를 들을 만합니다.


  아이들 옷을 장만하러 순천마실을 하면서 〈도그책방〉에 들릅니다. 어느덧 다섯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마을책집이자 그림책집으로 걸어온 다섯 해를 기리며 “한걸음은 하늘처럼, 두걸음은 둘이 함께, 석걸음은 서로 해바라기, 넉걸음은 넉넉히 함박눈, 닷걸음은 다시 하나라는 마음.” 같은 닷줄글(오행시)을 적어 봅니다.


  돌잔치는 ‘나이먹기’를 기리지 않습니다. ‘철들기’를 기리는 하루이자 한 해예요. 첫돌은 처음 내딛는 걸음을, 두돌은 두근거리듯 나선 걸음을, 석돌은 서로 돌아보는 마음인 걸음을, 넉돌은 너그러이 빛나는 걸음을, 닷돌은 다같이 어깨동무하는 눈빛을 기릴 만한 나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섯돌이며 일곱돌에는 어떤 걸음을 기릴 만할까요? 온누리 마을책집이 저마다 다르게 걸음마를 떼고, 철빛을 머금고, 책넋을 마십니다. 책집지기도 책손도 새삼스레 살림길을 다스리면서 천천히 아름답게 달라질 푸른별로 나아가도록 꿈을 그립니다. 꿈꾸는 겨울은 포근하게 품고, 깨어나는 봄은 환하게 트고, 빛나는 여름은 활짝 노래하고, 무르익는 가을은 곱게 여밉니다.


《안녕, 겨울》(케나드 박/서남희 옮김, 국민서관, 2017.11.30.)

《세상의 많고 많은 빨강》(로라 바카로 시거/김은영 옮김, 다산기획, 2021.11.15.)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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