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찍는 마음 (2022.5.24.)
― 인천 〈모갈1호〉
책집은 어릴 적부터 다녔지만, 1998년에 이르러서야 책집을 빛꽃(사진)으로 담자고 생각했습니다. 1998년 여름이 저물 즈음 처음으로 제 찰칵이(사진기)를 곁에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외대 ‘우리말 연구회’ 동생한테서 빌렸는데, 이 찰칵이는 제가 일하던 신문사지국에 도둑이 드는 바람에 잃었습니다.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를 하며 32만 원 일삯을 받았는데 15만 원을 꼬박꼬박 우체국에 부었습니다. 모둠돈(적금통장)이 있기에 우체국에서 어렵게 돈을 빌려 동생 찰칵이를 새로 사서 돌려주고, 제 몫으로 12만 원짜리 낡은 미놀타 찰칵이를 장만합니다.
아무리 닦아도 때가 안 벗겨지는 낡은 찰칵이여도 늘 목걸이로 삼았고, 1998년 가을에 “아, 난 날마다 헌책집을 여러 곳 드나드는데, 난 헌책집을 찍으면 되겠구나! 게다가 기자란 놈팡이는 헌책집을 늘 다 쓰러져 가는 얄딱구리한 모습에 엉터리로 찍잖아! 책집은 책집을 다니는 사람이 찍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아직 어느 누구도 책집(헌책집·마을책집)을 찰칵찰칵 담을 생각을 않던 1998년 즈음, 목에 찰칵이를 걸고 들어가니 모든 책집지기님이 손사래칩니다. “자네, 목에 뭔가?” “사진기예요.” “사진기는 왜?” “책을 읽으면서 책집을 찍으려고요.” “어험어험, 사진을 찍으려면 여기서 나가든가, 책만 보려면 들어오든가, 하나만 해!” 그무렵 모든 책집은 기자란 놈팡이가 엉터리로 찍어서 싣는 빛꽃 탓에 다들 싫어했습니다. 아무리 단골이어도 손에 찰칵이를 쥐면 끔찍히 싫어하는 모습을 보고는 얌전히 등짐에 넣었어요. 그래도 책집 앞모습을 살며시 찍고, 책집지기님이 자리를 비우면 얼른 책시렁을 둘러보며 몇 자락 찍었습니다.
1998∼2000년 세 해 동안 이렇게 ‘몰래 찍은 빛꽃’을 몽땅 종이로 뽑습니다. 이다음 책집마실을 하며 책값을 셈한 뒤, 책집 셈대에 살며시 놓았습니다. 이러고서 다음에 책집마실을 하면 “여보게, 여기에 우리 책집 사진이 있던데, 누가 찍었는지 아나?”“글쎄요. 사진이 잘못 나왔나요?” “아니, 우리 책집이 이렇게 멋있던가? 책집을 잘 아는 사람이 찍은 듯해서 궁금해서.” 옆에서 이 모습을 보던 다른 단골이 기웃하다가 “사장님, 그 사진은 이 젊은이가 찍었잖아요.” “어, 그런가? 그런데 왜 스스로 찍었다고 말을 안 해?” “사장님이 사진을 찍으려면 책집에 들어오지 말라 하셨거든요.” “어험어험, 앞으로 자네는 사진을 찍어도 되네.”
〈모갈1호〉 책시렁 곳곳에 있는 찰칵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스물 몇 해 앞서 겪은 일을 떠올립니다. 읽고 느끼고 새기는 마음에는 언제나 스스로 피어나는 즐거운 숨결이 흐르겠지요. 책을 읽고 장만하는 손길로 찍으면 누구나 빛꽃입니다.
ㅅㄴㄹ
《세칭 구원파란?》(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엮음, 신아문화사,1981.5.25.)
《21+1 新作抒情詩選輯》(장석주 엮음, 청하, 1987.3.25.)
《파라독스, 아이러니, 그리고 이솝 우화》(편집실 엮음, 시대평론, 1991.12.20.)
《高麗苑 詩文學 叢書 3 오늘은 未來》(박의상, 고려원, 1987.6.7.)
《高麗苑 詩文學 叢書 14 北村 정거장에서》(홍윤숙, 고려원, 1985.9.20.)
《高麗苑 詩文學 叢書 17 우리의 탄식》(이유경, 고려원, 1986.10.1.)
《아무튼, 언니》(원도, 제철소, 2020.7.20.)
《잃어버린 한 조각 + 나를 찾으러》(쉘 실버스타인, 선영사, 2003.1.30.)
《예술의 종언―예술의 미래》(김문환 엮음, 느티나무, 1993.6.2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