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풀노래 (2022.8.22.)
― 부천 〈용서점〉
어젯밤 고흥은 퍽 선선했습니다. 고흥 보금자리숲에서 지낼 적에는 깡똥바지차림입니다. 웃통을 벗어요. 시골집에서 살며 해바람을 듬뿍 머금으려는 뜻입니다. 열일곱 살 무렵 만난 동무는 햇살이 아무리 따가워도 이맛살을 안 찡그렸습니다. “넌 눈이 안 부시니?” 하고 물으면 “음, 눈부시다는 생각을 안 해. 해가 고맙지 않니? 고마운 해가 내리쬐는데 어떻게 이맛살을 찡그리니?” 하고 대꾸했어요.
동무한테서 ‘해를 바라보는 눈길’을 배우기 앞서까지는 한여름에 그늘자리로 걸었다면, 이날부터는 굳이 그늘길을 안 찾아요. 외려 해가 잘 비추는 길을 걷습니다. “땡볕인데 안 더워요?” 하고 묻는 이웃이 있으면 어릴 적 동무를 새록새록 떠올리면서 “이 아름다운 햇볕을 온몸으로 머금으려고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부천 〈용서점〉으로 “숲노래 수다꽃” 석걸음을 펴는 저녁입니다. 오늘은 ‘글·그림·그릇’을 놓고서 수다꽃입니다. 먼저 이 세 낱말이 어떤 말밑(어원)인가를 짚고 뜻풀이를 새롭게 합니다. 글은, 말을 담아낸 무늬이고, 그림은 마음을 담아낸 모습이고, 그릇은 살림을 담는 길입니다. 셋 모두 ‘담다’라는 대목에서 만나는데, ‘담으’려면 마음에 새길을 ‘그려’야 합니다. 스스로 그리려는 마음이 서기에 생각이 깨어나고, 이 생각을 다스려 그림으로 빚거나 그릇으로 빚거나 글로 빚어요. 수수하고 쉬운 우리말에 얽힌 수수께끼를 모르는 채 그림이나 글이나 그릇을 바라볼 적에는 ‘말에 깃든 삶’을 스스로 놓치게 마련이에요.
글에도 그림에도 그릇에도 “삶을 담는 마음”이 흘러요. 글을 꾸미거나 그림을 꾸미거나 그릇을 꾸미면 어떤 굴레나 틀로 치달을까요? 껍데기나 허울만 남겠지요. 글도 그림도 그릇도 꾸밀 까닭이 없어요. “삶을 마주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으면(옮기면) 됩”니다.
삶을 그릇으로 담고, 삶을 그림으로 담으며, 삶을 글로 담아요. 그릇을 비롯한 살림살이는 잘 빚어야 하지 않아요. 쓰고 싶은 삶길을 헤아려 빚으면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그림을 잘 그려서 자랑해야 하나요? 글을 잘 써서 책으로 널리 팔아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저 우리 스스로 짓는 삶을 글로도 그림으로도 그릇으로도 웃음꽃하고 눈물꽃을 버무려서 담으면 다 아름답습니다.
밤 열 시가 넘어 깃드는 길손집은 칙폭길(전철길) 바로 옆입니다. 2007∼2010년에 인천 배다리로 돌아가서 큰아이를 낳을 무렵이 떠오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칙폭칙폭 끝없이 옆으로 지나가며 하늘집(옥탑집)이 덜덜 떨렸거든요. 그런데 이 칙폭노래 사이로 풀노래가 흐릅니다. 귀뚜라미도 여치도 방울벌레도 풀무치도 있군요.
ㅅㄴㄹ
《현의 노래》(김훈, 생각의나무, 2004.2.10.첫/2006.1.10.19벌)
《깨어나소서 주여》(김남조, 종로서적, 1988.9.30.)
《국어 지필평가의 새 방향》(이형빈, 나라말, 2008.12.30.첫/2010.5.31.2벌)
《밤꽃 피는 유월에》(김정환 엮음, 지양사, 1085.12.20.)
《모든 사람은 혼자다》(시몬느 보봐르/박정자 옮김, 행림출판사, 1980.)
《增補 師林堂의 生涯와 藝術》(이은상, 성문각, 1962.9.9.첫/1966.8.1.보탬/1970.8.8.보탬 3벌)
- “보물 제165호 오죽헌 기념” 글씨
《박막례시피》(박막례·김유라, 창비, 2020.9.14.첫/2020.9.15.2벌)
《서점 숲의 아카리 1∼12》(이소야 유키/설은미 옮김, 학산문화사, 2010.2.25.∼2013.10.2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