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7.1.

아무튼, 내멋대로 17 욕



  어린이일 적에도 푸름이일 적에도 막말(욕)을 쓴 일이 없다. 또래나 언니나 동생은 툭하면 ‘x새끼’ 같은 말을 썼으나, 나는 싸움판(군대)에 끌려가서 열여덟 달째(상병 6호봉)에 이르도록 아무 막말을 안 썼다. 열두 살 무렵으로 떠오르는데, 하도 괴롭히고 놀리는 마을 언니가 있어, 한 오십 미터쯤 떨어진 데에서 언니한테 “야, 이 돼지야!” 하고 한 마디를 하고 스스로 부끄러웠다. 돼지가 무슨 잘못인가. 어린배움터를 다니는 동안 막말을 안 쓴 사내는 나랑 ㄱ이라는 동무 둘뿐이었다. 푸른배움터를 다닐 적에 막말을 안 쓴 사내는 나랑 ㅈ이라는 동무 둘뿐이었다. 싸움판에서 스물여섯 달을 지켜보는 동안 막말을 안 쓴 ㅈ이라는 사람이 생각난다. 어느 날 ㅈ이라는 뒷내기하고 밤지기(불침번)를 설 적에 넌지시 물었다. “ㅈ상병님은 왜 막말을 안 씁니까?” “님이라니요, 최뱀(최 병장님) 말 낮추세요.” “둬 달이면 ㅈ상병님도 병장이 될 테고, 그때엔 저도 이 무시무시한 데를 떠날(쩐역) 텐데요, 저보다 세 살 위이니 이제는 님이라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음, 다들 막말을 해도 나까지 하면 내 입이 더러워지잖아요. 막말을 쓰면 앞에서는 후임병이 따라오거나 고분고분한 듯해도 얼마 안 가 똑같아요. 그러면 하나 마나이기도 하잖아요. 그냥 처음부터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같이 잘 하자고 하고 싶어요.” “그런데 혼자만 막말을 안 쓰잖아요.” “하긴 그렇지요. 그래도 한 사람부터 안 쓰면 앞으로는 다르겠지요.” 스물한 살까지 막말을 안 쓰고 용케 살아왔으나 스물두 살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꺾여, 그날(상병 6호봉)부터 그곳(군대)을 떠나는 날까지 날마다 입에 막말을 달고 살았다. 주먹이나 발길을 안 썼으나, 다들 내 입에서 나오는 막말이 허벌나게 무시무시해서 소름이 돋고 섬찟했단다. 나는 때리기나 얼차려는 시키지 않고 말로 볶았다. 싸움판을 떠나 삶터로 돌아오고 보니 툭하면 싸움판 때 버릇이 불거지고, 그곳에서 내뱉던 막말이 문득 흐르면 둘레가 싸했다. ‘아차, 큰일을 저질렀구나.’ “잘못했습니다. 싸움판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용을 쓰다가 그만 마음도 입도 더렵혔습니다. 주둥이를 다물겠습니다. 아니 ‘주둥이’가 아니지요, ‘입’이지요.” 물든 입에서 물을 빼기는 버거웠다. 어쩌면 앞으로도 쉽지 않을는지 모른다. 곁님을 만나며 막말질이 섣불리 튀어나오지 않도록 다독였고, 두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어버이가 어버이다우려면 아무 말이나 내뱉지 않는, 아니 늘 사랑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재우며 밤마다 한나절(네 시간)씩 노래를 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틈나는 대로 노래(동요)를 불렀다. 밥을 차리면서, 빨래를 하면서,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달리면서, 아이를 업거나 안으며 거닐면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늘 노래를 불렀다.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는 길에 큰아이한테 우리글(한글)을 알려주려고 노래꽃(동시)을 처음으로 썼다. 2009년이었지 싶다. 이제 돌박이인 큰아이는 숲노래 씨가 늘 쓰는 글을 저도 쓰겠다고 숲노래 씨 붓을 가로채어 바닥이고 책이고 신나게 그렸다. 적어도 여덟 살이나 열 살에 글을 알려주려 했으나 돌 무렵부터 우리글을 알려주면서 ‘아이한테 알려줄 글’을 노래로 불렀다. 이때부터 어느새 막말은 자취를 감추어 간다. 노래꽃쓰기(동시쓰기)란, 삶말로 돌아가면서 살림말을 돌아보고 사랑말을 새롭게 찾는 ‘마음빛닦기’라고 느낀다. 싸움판에 안 끌려갔으면 아마 막말을 쓸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면 아이를 낳고서도 노래꽃을 쓸 일이 없었으려나? 곰곰이 생각하니 그렇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닐 테지. 싸움을 물리칠 수는 없으나, 싸움을 사랑으로 녹이자면 ‘노래를 꽃으로 부르면’ 되는 줄 아이들한테 날마다 새록새록 배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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