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2.6.25.
아무튼, 내멋대로 16 육아 전담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여섯 달마다 ‘장래희망’이란 이름으로 무슨 종이를 빼곡하게 채워야 했다. 왜 이런 종이를 써내야 하는지 알 턱이 없으나, 배움터에서 뭘 시킬 적에 안 하면 엄청 얻어맞았기에 고분고분 다 해내야 했다. ‘난로 당번’으로 있을 적에 ‘우리가 낸 모든 숙제’를 불쏘시개로 쓰는 줄 알아채고는 그 뒤로 배움터에서 뭘 내라는 짐(숙제)을 참 하기 싫었다. 아무튼 13살에 이르도록 ‘짝 안 맺고 혼자 살겠다(비혼)’고 적었다. 푸른배움터에 다니던 14∼19살에도 한결같았다.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열린배움터(대학교)를 다니며 ‘아! 서울에 나와 보니 이 땅에는 꽉 막힌 사람만 있지 않구나? 찾아보면 열린 사람도 있겠구나!’ 하고 느꼈고 ‘짝을 맺고 살아도 되겠구나’ 하고 새마음을 품었다. 스무 살부터 제금을 나며 밥옷집 살림을 혼자 건사했다. 되도록 안 먹거나 가볍게 먹고, 모두 손으로 빨래하고, 집에는 보임틀(텔레비전)·거울·옷칸 따위를 안 들여놓고, 얇은 이불 한 채가 끝이고, 나머지는 책으로 채우고, 자전거 하나를 곁에 두기로 했다. 글을 쓰려고 셈틀을 켤 적을 빼고는 전기를 쓸 일이 없는 살림이었다. 싱싱칸(냉장고)조차 안 썼으니까. 내가 혼자 사는 집에 찾아온 분들은 입을 쩍 벌렸다. “와, 이 집엔 책밖에 없네. 아니, 옷도 없고 그냥 책만 있네.” “네, 책 말고 뭐가 더 있어야 하지요? 제가 숲에서 살면 책조차도 없고, 종이랑 붓 하나만 둘는지 모르는데, 나중에는 종이랑 붓조차 치울는지 몰라요.” 옷칸 없이 살다가 곁님을 만나 짝을 이루면서 옷칸을 놓았다. 아기가 태어날 때를 앞두고 집에 잔뜩 있던 책을 책마루숲(서재도서관)으로 옮겼다. 짝꿍하고 아이랑 함께 살아갈 적에는 집에 책만 놓을 수는 없다. 그릇에 수저에 수건에 이모저모 살림이 있어야 한다. 곁님은 피아노를 들이자고 했다. 집 한복판에 누구나 언제라도 실컷 노래를 누리도록 커다란 가락틀(악기)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더라. 목돈을 헐고 언니한테 빌려서 피아노를 들였고, 살림돈을 조금조금 모으는 대로 다른 가락틀을 하나둘 들였다. 2013년 무렵 빨래틀(세탁기)도 들였다. 내가 바깥일로 집을 비워야 할 적에 곁님이 천기저귀나 이불을 빨아야 할 수 있기에, 이제는 없으면 안 되겠더라. 빨래틀을 들였어도 난 예전처럼 손빨래를 한다. 어수룩하거나 모자란 대목은 으레 곁님이 따박따박 들려주는 꾸지람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천천히 추스르거나 고친다. 집안일하고 아이돌봄을 도맡아 하는 길에 “아름답고 아늑하여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는 언제 어떻게 이룰 만한가 하고 짚어 보았다. 사내(아빠·남자)란 자리는 머스마(머슴)라는 이름 그대로 모든 일을 맡아서 할 노릇이다. 가시내(엄마·여자)란 자리는 갓(메·山)이란 이름 그대로 기쁘게 노래하고 가락틀을 타면서 신나게 놀 노릇이다. ‘몸쓰는 힘(힘살·근육)’을 타고난 사내(머슴·벗)는 기쁘게 일하면서 “가시내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노래를 사랑으로 들으면서 기운을 내면 즐겁”다. ‘몸쓰는 힘’이 아닌 ‘마음을 달래며 사랑을 그릴 줄 아는 숨결’을 타고난 가시내(갓)는 “기쁘게 놀고 노래하면서 아이들하고 짝꿍(사내)이 삶을 즐기는 웃음꽃을 눈부신 빛살로 받아안으면서 깨어나도록 북돋우면 즐겁”다. ‘육아분담’은 부질없다. 가시버시(여남) 모두 집안일하고 아이돌봄을 할 줄 알아야 하면서, 이 몫을 버시(사내)가 도맡으면 된다. 이따금 버시가 멀리 바깥일을 다녀와야 할 적에 비로소 가시(가시내)가 집안일하고 아이돌봄을 살짝 맡아 주면 된다. 오늘날 터전을 돌아보면, 숱한 사내는 집안일을 안 하고 아이도 안 돌본다. 아이 똥기저귀를 손수 갈며 빨래하고 씻기는 우두머리(대통령)가 있었나? 어느 감투꾼(국회의원·장관·시도지사)이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를 돌보는가? 사내들이 집안일·아이돌봄을 안 하니 자꾸 싸움판(군대)을 키우고 총칼(전쟁무기)을 만들어서 바보짓(전쟁)을 일삼는다. 그리고 바보짓 사내처럼 ‘놀고 노래하며 웃음꽃을 지피는 가시내 살림길’이 아닌 ‘감투랑 벼슬을 노리는 가시내’가 너무 늘었다. ‘나라 없는 나라’여야 아름답다.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지어’야 비로소 사랑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