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먼길 (2022.2.16.)
― 부산 〈책과 아이들〉
마음이 닿으면 언제나 따사로이 만납니다. 마음이 안 닿으면 옆에 있어도 차갑습니다. 마음을 담아 사랑씨앗을 심은 책이기에, 이 책을 여민 글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더라도, 두 손에 쥔 책에서 부드럽고 상냥한 빛줄기가 퍼져나오는 줄 느껴요. 사랑씨앗을 심으려는 마음이 없거나 얕은 책이기에, 이 책을 여민 글님이 여러모로 이름나거나 새뜸(언론)에 자주 얼굴을 비추더라도, 두 손에 쥔 책에서 아무런 빛줄기를 못 느낍니다.
책집지기란, 돈을 많이 버는 길이 아닌, 돈을 즐겁게 벌면서 책을 곁에 두는 길이라고 느껴요. 책손이란, 책을 많이 사는 길이 아닌, 책을 즐겁게 읽으면서 삶을 스스로 빛내는 길이라고 느껴요. 책집지기하고 책손은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가 아닌, “마음에 사랑씨앗을 심으려는 눈빛”으로 만나기에 반갑습니다. 책집지기하고 책손은 “더 높이 더 좋게 더 널리”가 아닌 “늘 이곳에서 오붓하게 사랑으로 읽고 나누려는 손빛”으로 마주하기에 즐겁습니다.
서울하고 부산은 먼 듯하지만 부릉길이나 칙폭길이 많습니다. 광주하고 부산도 매한가지입니다. 고흥하고 부산은 그냥 멀고, 광주도 대구도 대전도 하나같이 머나먼길입니다. 다만 길그림으로 따지거나 길삯으로 치면 멀 뿐이요, 마음으로 헤아리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이웃길’이에요.
책이란, 또다른 이웃을 만나는 길이라 할 만합니다. 대단한 글님이나 멋진 글바치나 훌륭한 글빛이나 엄청난 글벗을 읽으려는 책이 아닌, 마음으로 사귀면서 스스로 이 마을살림을 북돋우는 즐거운 기운을 돌아보려는 길이지 싶어요.
마을책집에 마을책손이 드나들고, 먼먼 곳에서 문득 이따금 가볍게 마실을 합니다. 옆에 있는 책집이라면 날마다 기웃거릴 테고, 가까이 있는 책집이라면 자주 들락거릴 테며, 멀리 있는 책집이라면 마음으로 언제나 생각합니다. 〈책과 아이들〉에 작은아이하고 찾아갑니다. 마당이 있고 그네걸상이 있고, 나무에 새가 내려앉아 노래합니다. 책터는 두 칸으로 나누었고, 한쪽 칸은 디딤길을 오를 수 있고, 마음에 맞는 책을 마주하면 마룻바닥에 앉아서 느긋이 새나라로 갈 만합니다.
아이라면 으레 바닥에 느긋이 앉습니다. 어른이라면 고요히 섭니다. 앉은읽기로 마음나들이를 가고, 선읽기로 마음달래기를 합니다. 바람읽기로 하루를 알고, 꽃읽기로 숨결을 알고, 숲읽기로 사랑을 알고, 마음읽기로 사람을 압니다.
부산 〈책과 아이들〉 지기님이 《서점은 내가 할게》를 선보였습니다. 책집지기는 마을에서 책살림을 펴고, 책손은 마을길을 거닐며 책사랑 발걸음을 뗍니다.
ㅅㄴㄹ
《바다로 간 고래》(트로이 하월 글·리처드 존스 그림/이향순 옮김, 북뱅크, 2019.10.15.)
《서점은 내가 할게》(강정아·이화숙, 빨간집, 2022.1.31.)
《별》(알퐁스 도데/손경애 옮김, 대원사, 1990.2.9.)
《나의 유서 맨발의 겐》(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김송이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14.1.6.)
《나비문명》(마사키 다카시 글/김경옥 옮김, 책세상, 2010.10.12.)
《노양근 동화선집》(노양근 글, 최명표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6.10.)
《자꾸자꾸 책방》(안미란과 아홉 사람, 사계절, 2022.1.1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