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집 언저리 2021.11.8.

헌책집을 찍습니다



  처음에는 “책숲(도서관)에서 안 다루는 책이 가득한 바다”라고 느꼈습니다. 이윽고 “때(시간)하고 곳(장소)을 잊으면서 스스로 짓고 싶은 새로운 때하고 곳으로 날아가는 징검다리인 책으로 상냥한 쉼터”라고 느꼈습니다. 주머니가 늘 가난했기에 “가난한 이한테도 가멸찬(부자) 이한테도 고르게 책사랑을 들려주는 이야기밭”이로구나 싶었습니다.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책마실을 다니는 동안에 “다 다른 눈빛으로 지은 다 다른 삶빛을 어제하고 오늘하고 모레로 이으면서 속삭이는 배움터”이네 하고 깨닫습니다. 저는 낱말책(사전)을 짓는 일을 하기에 어제책·오늘책을 나란히 살피면서 모레책을 엮습니다. 이러한 글살림·책살림은 새책집·헌책집을 늘 나란히 품으면서 사람길·살림길·숲길을 헤아리는 글길이라고 할 만합니다. 앳된 열일곱 살에는 둘레에서 말하는 대로 ‘헌책집’이라고만 받아들였으나, 스무 살을 넘고 서른 살로 접어들 즈음에는 ‘손길책집’으로 느끼고, 마흔 살에 이를 무렵에는 ‘손빛책집’으로 느낍니다. “글쓴이·엮은이·펴낸이에다가 새책집지기·책숲지기(도서관 사서)뿐 아니라 책동무(독자) 손길까지 어우러진 책을 차곡차곡 여투는 곳”이 헌책집입니다. “모든 책이 새로 태어나서 읽히는 곳”이요, “모든 책에 새숨을 불어넣으면서 새빛을 그리는 곳”이 헌책집입니다. 저는 이 헌책집을 다니면서 1998년부터 찰칵찰칵 담았습니다. 오래된 책을 다루는 곳이 아닌, 낡거나 허름한 책을 다루는 곳이 아닌, 값싸거나 잊혀지거나 한물간 책을 다루는 곳이 아닌, “어제책을 오늘책으로 삼아 모레책을 짓는 슬기로운 눈빛을 북돋우는 곳”인 헌책집을 스스로 느끼는 대로 한 자락 두 자락 담는 나날이었습니다. 헌책집에서 책을 장만하여 읽은 첫날은 1992년 8월 28일입니다만, 헌책집을 찰칵찰칵 담은 첫날은 1998년 8월 어느 하루입니다. 헌책집을 늘 찾아다녔으나 헌책집을 스스로 찍자는 생각을 제대로 하기는 1999년 1월 1일부터입니다. 날마다 헌책집에서 책바다를 누렸으나 이 책빛을 손수 담기까지 일곱 해가 더 걸린 셈인데, 이동안 조용히 사라진 곳이 참 많고, 오늘까지 즐겁고 씩씩하게 책살림을 짓는 곳이 제법 많습니다. 헌책집은 언제나 마을 한켠에 깃듭니다. 번쩍거리는 한복판이 아닌, 우리가 보금자리를 이루어 조촐히 살림을 짓는 마을에서 태어나는 헌책집입니다. 손길을 돌고돌며 새삼스레 빛날 책을 마을에서 가만히 나누는 책터이자 쉼터이자 이음터이자 만남터인 헌책집입니다. 마을책집(동네책방)은 바로 헌책집이 첫걸음이었다고 할 테지요. 오롯이 마을사람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상냥하게 책숨을 펴온 헌책집을 문득 들여다보는 이웃님이 늘어나기를 바라요. 높지도 낮지도 않게 책노래를 조용히 퍼뜨리는 이 헌책집에서는 어린이도 할머니도 똑같이 반갑고 즐거운 책손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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